복식-장신구 등 생활사 정보 가득… 토기론 드물게 ‘국보’
《 일제강점기인 1924년 5월 10일 경북 경주시 노동리 금령총(金鈴塚)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발굴은 속전속결로 진행돼 불과 보름 만에 무덤 주인공이 있는 유해부에 가까워졌다. 중요 유물이 출토될 것을 기대하고 발굴의 정밀도를 높였다. 5월 27일 오후 조사원이 흙을 들어내자 황금빛 광채가 번쩍 빛났다. 두 번째 신라 금관이 출토된 순간, 사방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
1924년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91호 ‘기마인물형 토기’의 주인상(위쪽)과 시종상은 어린 나이에 숨진 왕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추정이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광복 후 우리 정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보물로 관리한 유물을 국보와 보물로 나누면서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108건을 국보로 지정했다. 이때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 2점이 국보 91호로 이름을 올렸다. 함께 출토된 금관은 두 달 뒤 보물 338호로 지정됐다. 당시 문화재위원들은 왜 금관이 아닌 기마인물형 토기를 국보로 지정한 걸까. 이는 토기들이 완벽한 조형미와 신라의 생활사를 해명할 수 있는 여러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왜 이 토기를 만들었을까. 기마인물형 토기는 하나의 조형예술품이지만 동시에 주전자의 기능을 갖고 있다. 아마 그 속에는 술을 담았을지도 모르겠다. 말의 등 부위에 있는 구멍을 통해 술을 채운 다음 앞쪽에 나와 있는 주구로 따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유물을 평소 애용하던 주전자로 보기는 조금 어색하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는 보통의 토우와 달리 유독 인물 표현이 세밀해 누군가를 모델로 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무덤 주인이거나 관련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장식대도 등 유물의 크기가 모두 작은 점이 눈에 띈다. 학자들은 이 점에 주목해 무덤의 주인공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신라 왕자로 추정한다.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신라왕은 자신의 아들이 일찍 숨을 거두자 깊은 슬픔에 젖어 최고의 장례의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당대 최고 장인에게 명해 왕자와 그를 수행할 시종의 조각상을 함께 만든 뒤 그 안에 잘 익은 술을 가득 담아 무덤 안에 넣은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