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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칼럼]‘메르스’를 ‘케르스’로 바꾼 대한민국

입력 | 2015-06-08 03:00:00

중동의 ‘메르스’가 한국에 와 정부의 무능, 시민의 이기로
코리아 메르스, ‘케르스’가 됐다
정보공유 총력대응 공동책임이 답… 정부는 겸허히 전 역량 모으고
국민은 시민정신으로 협조해야
언론도 세월호 이어 시험대에 재난보도준칙 다시 꺼내보고
속보성보다 정확성에 무게를




심규선 대기자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MERS)가 한국에서 확산되는 양상을 보면 메르스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 같다. 한국이기적호흡기증후군, 케르스(Korea Egocentric Respiratory Syndrome·KERS)는 어떤가. 초동대응의 참담한 실패는 분명 정부의 이기적 무능과 일부 시민의 일탈에서 비롯됐다. 그런데도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권한다툼을 벌이고, 의심환자의 종적 확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은 불안을 키운다.

정부는 정보와 권위, 행정력과 강제력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다. 그런데도 이를 제때에, 제대로 행사하는 데 허무하게 실패했다. 무능, 그 자체였다. 정부 판단에 대한 과신, 정보의 독점, 행정 비밀주의와 편의주의, 외부 의견 무시 등이 원인이었다. 모두가 조직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본다. 거짓말하지 말라, 본질에 충실하라, 시간을 놓치지 말라, 제3자의 입장에서 판단하라, 도와줄 사람은 없다고 가정하라,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라, 기대 이상의 것을 제시하라 등등이다. 정부는 정보 공개와 공유를 미적대면서 초장부터 신뢰를 잃었다. 대책의 본질인 ‘격리’에 맥 없이 실패했으며, 그 후에도 긴 시간을 허송세월했다. 정부의 논리에 빠져 국민이 느낄 공포의 크기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고, 정부가 최후의 보루라는 책임의식과 절박감도 매우 부족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깎아내리다 보니 상황 악화에 당황하고, 내놓는 대책은 뒷북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원칙 하나 만족시키지 못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심야 회견과 대정부 요구는 그 틈새를 파고든 것이다. 박 시장의 행동은 무능하고 소심했던 정부가 치러야 할 대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박 시장의 기자회견을 55%가 지지한다는 여론조사는 정부와 국민의 정서상 괴리를 의미한다. 비판하기에 앞서 수족이 머리 위에 올라타도록 허점을 보인 정부가 자성하는 게 순리다.

위기 대응의 마지막 단계는 변화의 결과를 증명하는 것이다. 정부가 선제적, 구체적, 효율적인 대책을 내놓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최경환 총리대행이 어제 여러 대책을 내놓았다. 어떤 대책이든 의도와 효과가 분명해야 하고, 그러려면 원칙이 있어야 한다. 3통(대책기구의 통일, 대응책의 통일, 정보공개 창구의 통일), 3전(모든 역량의 동원, 모든 국민의 협조, 모든 정보의 공유), 3협(중앙정부의 행·재정 협력, 지자체의 인력 및 행정 협력, 국제사회의 협력)을 원칙으로 최악의 상태인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고 공포의 확산을 막는 게 급선무다. 결국은 정보공유를 통한 총력대응, 공동책임만이 답이다.

메르스 제어는 격리에 성패가 달려 있다. 의심환자가 정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외국으로 나가고, 격리장소를 몰래 빠져나와 골프장으로, 고향으로 달려간 것은 부끄럽고 충격적이다. 개인적 이기심의 표출이다. 중국과 홍콩이 한국을 비난하고, 외국이 한국인의 수준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만을 비난하기엔 왠지 뒤통수가 따갑다. 우리는 광복 이후 ‘지위경쟁’에 매몰돼 모든 행동과 목표의 중심에 ‘나’를 두어왔다.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람이 나타나는 게 당연하다. 이번 사례는 우리의 시민정신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참 모자란다는 것을 확인시켜 줬다. 교육계에서 요즘 ‘시민정신 함양’, ‘세계시민 육성’을 거론하는 게 우연이 아니다. 안병영 전 교육부 장관이 교육 개혁의 방향으로 ‘경쟁과 상생의 조화’ ‘인성교육의 강화’를 제시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언론은 어떤가. 아직은 세월호 참사 때의 비난은 받지 않고 있다. 주류 언론만이라도 지난해 9월 16일 5개 언론 단체가 함께 만들어 발표한 ‘재난보도준칙’을 다시 꺼내봤으면 좋겠다. 준칙은 급성감염병, 인수공통전염병 등의 ‘질병 재난’도 재난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바로 이번 경우다. 준칙은 속보성보다는 정확성에 무게를 두라고 권고한다. 또한 예방정보 제공과 유언비어 방지, 공식 발표의 존중, 자체 취재의 경우 정확성과 객관성 담보, 선정적 보도 지양, 감정적 표현 자제 등도 규정하고 있다. 지금 꼭 필요한 원칙들이다. 정부만이 아니라 언론도 시험대에 올라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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