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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의 발상의 전환]흔들림 없는 뒷모습의 미학

입력 | 2015-06-09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영진 작가

요즘은 이삿짐을 쌀 때 박스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이상 보따리를 보기 힘들다. 그런데 보따리로 싸는 짐엔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고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 크기와 매듭의 모양, 색깔도 취향마다 제각각이다. 게다가 보따리 짐에서 우리는 종착지도, 목적지도 없는 ‘묻지 마 이사’를 떠올린다.

김수자는 프랑스 파리 남동쪽 변두리에서 파리 중심부 사이를 이동하며 보따리 트럭 이주 퍼포먼스를 가졌다. 이를 기록한 비디오 작업 ‘보따리 트럭-이민자들(Bottari Truck-Migrateurs)’(2007년·그림)에서 보듯 작가는 보따리 짐을 트럭에 잔뜩 쌓아놓고 그 위에 앉아 있다. 그는 이민자들에게서 수집한 헌 옷과 천으로 만든 보따리를 실은 낡은 트럭을 타고 파리의 역사적 장소들을 돌아다녔다.

퍼포먼스의 여정은 파리의 외곽인 비트리에서 시작하여 파리 도심을 돌아 성 베르나르 성당에까지 이르렀다. 수집한 헌 옷과 천의 꾸러미들은 프랑스 내의 다양한 인종과 국적을 나타낸다. 여정의 종착지인 성 베르나르 성당은 1996년 불법 이민자들이 성당 문에 쇠사슬로 자신들을 묶었던 저항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비디오에서 스쳐 지나가는 이국적 도시 풍경과 달리 보따리 짐 위에 차분히 앉아있는 작가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그의 정적인 자세는 작가 자신이 보따리가 된 듯 고정되어 있다. 알록달록 다채로운 보따리들은 검은색의 단순하고 올곧은 작가의 뒷모습을 통해 그의 고독한 존재감을 부각시킨다. 보따리 트럭 위에 앉아 정처 없이 떠도는 ‘이민자’의 포스는 환경의 변화에도 꿈쩍하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김수자의 퍼포먼스는 이산(離散)과 더불어 노마드 주체를 떠올리게 한다. 노마드가 글로벌한 현대 주체로 부각된 지 오래다. 짐 보따리가 갖는 이주의 메타포는 문화적 차이와 무관하게 보편적이다. 김수자는 이러한 보편성에 호소하면서 한국의 고유한 보따리를 세계적으로 만들었다. 신세대의 눈에 ‘촌스러운’ 보따리들은 우리의 6·25전쟁과 난민의 역사적 아픔도 다 함께 싸안고 있는 거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김수자의 작업은 우리 안에 뿌리를 둔 한국의 미감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린 좋은 예다.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중심을 잘 잡으면 이겨낸다. 달리는 트럭 위 미동도 없는 작가의 뒷모습처럼.

전영백 홍익대 예술학과(미술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