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는 시약 만들자” 교수직 버리고 창업
천종윤 씨젠 사장이 한번에 여러 병원체를 검사할 수 있는 시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상철 전문기자
천종윤 씨젠 사장(58)은 삼촌의 사업 자금 지원 약속을 믿고 이화여대 생물학 교수를 그만뒀다. 대학에서 후학을 키우고 순수 연구를 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사업을 통해 인류에 기여하는 게 더 가치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2000년 삼촌에게서 3억 원을 받아 바이오 벤처기업 씨젠(Seegene)을 창업했다. 자금을 대 준 삼촌은 ‘애니콜 신화’의 주역으로 한때 100억 원이 넘는, 삼성 사상 최고 연봉을 받았던 천경준 전 삼성전자 기술총괄 부사장이다.
“먼저 분자 진단 사업을 시작한 로슈 같은 글로벌 기업이 20년 전에 개발된 기술을 쓰는 것을 보고 새 기술로 신제품을 내놓으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분자 진단은 DNA, RNA 같은 유전자 정보를 분석해 메르스 같은 호흡기 질환, 성병, 간염, 결핵 등 각종 질병을 진단하는 선진 기법이다. 발병 전인 잠복기에도 진단할 수 있고, 항원 항체 반응을 이용하는 기존 면역진단법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조기 진단으로 질병의 완치율을 높이고 치료비도 줄일 수 있다. 이런 장점으로 분자 진단은 산업화 초기이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분자 진단에 필요한 유전자 증폭 기술(PCR)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아 진입 장벽이 높다.
천 사장은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연구에만 매달려 새 유전자 증폭 기술인 ‘ACP’를 개발했다. 유전자를 증폭하려면 프라이머(Primer)라는 미세 DNA가 복제하고자 하는 유전자와 정확하게 결합해야 한다. ACP는 새로운 개념의 프라이머 구조를 통해 DNA 사슬 중에서 원하는 타깃 유전자만 대량 증폭하는 신기술이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환자 진단에 쓸 수 있는 산업용 기술 개발에 나섰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2005년 여러 타깃 유전자를 한번에 증폭하는 ‘DPO’ 기술을 개발했다. 한 번의 검사로 여러 병원체를 동시에 진단하는 동시 다중 분자 진단 시대를 연 원천기술이다.
“성 매개 감염 원인균 6종을 동시 검사하는 제품으로 성병 의심환자 600여 명을 검사했더니 19%였던 감염률이 82%로 높아졌어요. 매독과 임질 검사만으로 확인할 수 없던 환자까지 찾아낸 거죠.”
처음부터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 병원과 검진센터를 찾아가 시연을 하며 성능을 확인시켰다. 대다수 의사는 동시 다중 검사가 개별 검사보다 정확할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우수성을 입증하는 임상실험 결과가 나오고 논문들이 발표되자 2008년 미국 대형 검진센터인 바이오레퍼런스가 제품을 주문했다.
2010년 실시간 유전자 증폭 기술(READ)에 이어 동시 다중 실시간 유전자 증폭 기술(TOCE, MuDT)도 개발했다. 이 기술로 호흡기 병원체 26종, 성 매개 감염 원인균 28종, 자궁경부암 원인균인 인유두종 바이러스 28종 등을 한번에 검사하는 제품을 만들어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씨젠은 해외 50여 개국, 300여 개 병원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시가총액은 1조 원을 넘는다.
천 사장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친의 사업 부도로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하게 살았다. 결핵에 걸려 검정고시를 거쳐 건국대 농대에 입학했다. 학자의 꿈을 이루려고 대학 졸업 후 6개월 치 생활비를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에 매진해 테네시대에서 생명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누구나 적은 비용으로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분자 진단 대중화에 앞장서겠습니다.”
임신 진단처럼 키트로 질병 유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그의 도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김상철 전문기자 sckim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