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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이승건]눈물 그리고 여자월드컵

입력 | 2015-06-10 03:00:00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열흘 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개막작은 영국 거린더 차다 감독의 ‘슈팅 라이크 베컴’(2002년). 베컴처럼 유명한 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영국의 인도계 소녀 2명이 주인공이다. 한일 월드컵을 통해 한국 여성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베컴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가족과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축구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들의 얘기는 유쾌하고 감동적이었다.

몇 년 뒤 여자축구를 다룬 또 하나의 영화 ‘그레이시 스토리’(2007년)가 나왔다. 배경은 ‘슈팅 라이크 베컴’보다 훨씬 앞선 1978년의 미국 뉴저지. 여중생 그레이시(칼리 슈로더)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오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축구 선수가 되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를 통해 국내에도 유명해진 엘리자베스 슈가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영화는 실제로 축구 선수였던 슈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두 편의 영화 모두에서 주인공(들)은 ‘비정상적’으로 여겨진다. 특히 그레이시가 남자들뿐인 축구부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1970년대는 ‘여자축구’라는 개념조차 희미한 상황이었다. 두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 “여자가 공부나 하지 무슨 축구를 하느냐”에는 축구는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이 깔려 있다. “성적으로 자극받을 수 있어 여성은 자전거를 타면 안 된다”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1837∼1901년)의 허무맹랑한 속설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을 때였다.

영화 속 그레이시와 같은 선구자들이 있었던 덕분일 것이다. 미국은 1990년대 이후 여자축구의 최강국이 됐다. 1991년 중국에서 열린 제1회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자국에서 개최된 1999년 여자 월드컵에서 미아 햄이라는 슈퍼스타를 탄생시키며 다시 정상에 올랐다. 올림픽에서도 3차례나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등 미국에서 여자축구와 선수들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여자축구 선수로 산다는 것이 외로웠다.” 전가을(25·현대제철)이 지난달 18일 여자 월드컵 대표팀 출정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 말이다. 그동안의 마음고생과 서러움이 오롯이 녹아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정말 많이 노력했다. 이 눈물이 헛되지 않게 열심히 뛰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전가을이 속한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현재 2015 캐나다 여자 월드컵에 출전 중이다. 2003년 처음 나간 미국 대회에서 3전 전패로 울었던 대표팀은 12년 만의 월드컵에서 첫 승과 16강 진출에 도전한다. 김대길 KBSN 해설위원은 “컨디션 조절을 잘하고 부상자만 나오지 않는다면 8강도 노려볼 만하다”고 전망했다.

목표를 이룬다면 한국 여자축구는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선구자 격인 전가을의 눈물이 결실을 본다면 후배들은 ‘덜 외롭게’ 축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가 다니면 그게 길이 된다.






이승건 스포츠부 차장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