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샌 안드레아스’
현충일이던 지난 토요일 오전 7시 반 멀티플렉스극장에서 할리우드 재난블록버스터 ‘샌 안드레아스’를 보았다. 이른 시간임을 감안하더라도 250석이 넘는 좌석엔 딱 6명이 앉아 있었다. 메르스 공포 탓인 듯했다. 메르스로 인한 재난상황에서 마스크를 쓴 채 재난영화를 관람하는 지금 이 순간이 왠지 아이러니하면서도 스릴 넘쳤다. 어쩌면 메르스보다 무서운 건 메르스를 둘러싼 우리의 무한상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있잖아. 사람은 말이야.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래. 그러니까 상상을 하지 말아 봐. ×나 용감해질 수 있어”라는 영화 ‘올드보이’의 명대사가 뇌리를 스쳤다.
진도 9의 초강력 지진이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서부를 강타해 쑥대밭이 되는 상황을 담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은 창조본능만큼이나 강렬한 파괴본능을 갖고 있음을 나는 스스로 확인했다. 땅이 쩍쩍 갈라지고 초고층 첨단빌딩들이 와르르 무너지는데 야릇한 쾌감이 밀려왔다. 대재앙이 벌어지자 구조대장인 주인공 ‘레이’(드웨인 존슨)가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자기 본분을 산뜻하게 망각한 채 제 아내와 딸을 살리기 위해서만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눈꼴시었지만, 이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이런 맹목적인 가족애를 포함한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문법을 발견하는 또 다른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①인종의 ‘포트폴리오’=‘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 떼돈을 벌려면 주류인 백인뿐 아니라 히스패닉, 흑인, 아시안 등 미국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인종의 마음을 모조리 훔쳐야 하는 법. 그래서 이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들은 인종적으로 절묘하게 ‘분산투자’되어 있다는 사실!
먼저 주연배우인 드웨인 존슨은 흑인 아버지와 서사모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또 그의 아내로 나오는 ‘엠마’ 역의 여배우 칼라 구기노는 이탈리아계다. 이 아내에게 구애하면서 주인공 부부의 유대를 위협하는 남자 ‘다니엘’ 역의 이언 그루퍼드는 전형적인 백인. 지진의 위험성을 알리는 교수 역의 폴 지어마티는 이탈리아계 백인이며, 이 교수의 연구팀원으로 대규모 지진을 처음으로 예측하는 명석한 수석연구원은 한국계 배우 윌 윤 리다. 교수의 곁에서 지진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리려 동분서주하는 TV 리포터로 출연하는 여배우 아치 판자비는 놀랍게도 인도계 영국인이란 사실. 이런 저인망 ‘인종그물’에 걸려들지 않을 미국인이 또 있을까.
②누구를 죽일까?=등장인물 중 대지진으로 가장 먼저 사망하는 자는 바로 수석연구원 역의 동양인 윌 윤 리. 그러나 영화가 그를 다짜고짜 없애버리면 수많은 아시아계가 ‘사회적 소수를 무시했다’며 탐탁지 않게 받아들일 터. 그래서 영화는 절체절명의 순간 윌 윤 리가 백인소녀를 살려내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반면 주인공의 아내에게 접근하는 백인남자는 자기만 살겠다며 도망쳤다가 결국 컨테이너에 깔려 죽는다. ‘이기적으로 굴면 죽는다’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주인공 부부가 재결합하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효과. 더욱 주목할 사항은 이 파렴치한 남자가 ‘부자’에다 ‘백인’이라는, 미국 주류의 ‘양대 조건’을 모두 갖춘 캐릭터라는 사실이다. 세상엔 주류보다 비주류가, 부자보단 부자가 아닌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법.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선 부자를 골라 죽여야 수많은 서민 관객들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다.
④요건 몰랐지?=블록버스터엔 바보 같은 남성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팔등신 미녀가 필수. 주인공의 딸로 출연하는, 이름도 섹시한 여배우 알렉산드라 다드다리오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녀는 영화 초반 다리를 다친 영국인 청년을 돕는다면서 돌연 재킷을 벗어 쭉쭉 찢어 청년의 다리를 동여매는데, 이후 한 시간이 넘게 그녀는 아슬아슬한 탱크톱 차림으로 재난의 현장을 누벼댄다. 이건 노출을 절묘하게 정당화하는 ‘신의 한 수’!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