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는 수생식물로 물속에 뿌리를 둔 채 자란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두는 것이 좋다. 오경아 씨 제공
오경아 오경아디자인연구소 대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빨래터는 실은 마을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 지붕이 덮여 있는 우물 근처에서 어머니는 빨래를 하고 계셨던 듯싶다. 그런데 이 빨래터보다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빨래터에서 흘려보낸 물이 모이던 곳, 그곳에 미나리가 자라고 있는 풍경이다. 마을 공동의 미나리꽝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짐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우물터의 계절은 여름이다. 아주머니들이 동네 아저씨들의 등에 물을 끼얹어 주면 아저씨들은 “어, 시원하다”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쩌면 어머니가 내게도 등물을 해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번쩍했던 등줄기의 시원함이 그 우물가와 미나리꽝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미나리는 물속에서 자라는 일종의 수생식물이다. 수생식물도 자라는 습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부레옥잠, 물상추, 개구리밥처럼 물에 떠서 사는 식물, 수련처럼 뿌리를 완전히 물속에 두고 잎과 꽃만 수면 위로 피워내는 식물, 아예 물속에서만 사는 식물 그리고 갈대처럼 뿌리만 살짝 물속에 둔 채 잎과 꽃을 지상 위에서 피우는 식물군이 있다. 미나리는 바로 갈대와 같은 습성을 지닌 식물로, 뿌리는 물에 잠겼어도 잎이 모두 지상 위로 올라온다. 미나리꽝은 ‘미나리를 기르는 밭’이란 뜻이다. 잘라내도 다시 또 왕성하게 자라는 게 고마워 곡식을 보관하던 ‘광’이라는 단어가 붙었고 이를 강하게 발음하면서 ‘꽝’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내 기억에서도 그러했지만 실제 미나리가 물을 정화하는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 그래서 수질개선을 위해 갈대와 함께 미나리를 대규모로 심기도 한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스토리 전개를 위해 느닷없이 기억상실이라는 장치를 참 많이 등장시킨다. 의학적으로 기억상실이 어떻게 정의되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기억상실이 꼭 특별한 사고를 당하고 뇌에 이상이 생겨야 찾아오는 것은 아닌 듯싶다. 잃어버린 우리의 어린 시절이 실은 다 기억상실이 아닐까. 하지만 그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분명 우리 머릿속에 보관돼 있다.
나는 미나리를 사면 잎은 잘라내고 뿌리 부분만 물에 담가 싱크대 앞에 놓는 습성이 있다. 어느 날 내가 누구에게 배워서 이런 걸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다 이미 내 기억에서는 상실된 어머니의 잔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미나리 뿌리를 그릇에 담아 햇살이 드는 창가에 올려 두곤 했던 내 친정어머니의 영상이 그제야 떠올랐다.
미나리는 서양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식물이다. 자생지가 한국과 중국, 일본, 베트남 등으로 아시아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물가에서 자라는 식물이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지만 미나리는 거의 유일하게 완전히 먹을 수 있는 식물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에서는 배추로 김치를 담갔던 때보다 더 오래전부터 미나리로 물김치를 만들었다. 잘 알려진 일이지만 지금의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버무리는 김치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김치를 담근다’는 표현 속에 확실히 남아 있는 것처럼 김치는 짠물에 담가 먹었던 역사가 훨씬 길다. 그래서 아직도 미나리 물김치는 지방에서는 돌나물을 함께 넣어 그 시원한 맛을 즐기는 곳이 많다.
오경아 오경아디자인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