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공약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 페이스북 배경화면에선 ‘내 말을 알아듣는 나라’로 대통령이 말을 잘 못해도 국민은 이해한다. 소통만 잘한다면 정부실패가 키운 메르스 사태 문책 한번 없이 수습 가능한가
김순덕 논설실장
1.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문이다. 게시물도 메르스 관련 발언이 많다. ‘중동감기’로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공포스럽진 않았을 메르스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기승을 부린 것은 ‘투명하고 신속한 정보 공개의 실패’ 때문이라고 한국-세계보건기구(WHO) 합동평가단은 지적했다. 한국 정부의 비밀주의가 2003년 사스 창궐 때의 중국과 맞먹는다는 건 참담한 일이다.
2. 번역기 제작자는 ‘박근혜 정부의 지난 2년 3개월을 요즘 신조어 딱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며 안 알랴줌(번역: 안 알려줌)과 아몰랑(번역: 아, 몰라)을 꼽았다. 대통령의 불통에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우리는 여전히 대통령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한다.
4. 물론 대통령은 말을 진짜 못한다. 잘못된 국어교육 정책의 적폐다(내 말도 녹음해서 다시 들으면 끔찍하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안 하는 것도 이 때문일 터다. 그러나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선 “메르스 확산이 잡혀 가고 있지만 상당수 확진환자들이 있어 한국 국민의 안전을 첫 번째로 두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방미(訪美) 연기 이유를 친절히 설명했다. 대통령이 자나 깨나 생각한다는 국민한테는 김성우 홍보수석을 통해 알렸을 뿐이다. 한국 대통령이 한국에선 기자회견도 하지 않는 건 내국인 차별인가, 한국 언론이 싫어서인가?
5. 언론 책임이다(내 탓이오). 메르스 확진환자가 나온 지 2주 만인 3일 별로 긴급하지 않게 열린 메르스 긴급점검회의에서 대통령은 “이 상황에 대해서도 한번 확실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고… 그 방안에 대해서도 알아보고…”라고 ‘알아보고’를 반복했다.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대통령의 언어와 거리가 멀다. 이 답답한 말씀을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 대응 과정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점검하고 현재의 상황과 대처 방안에 대해 분명하게 진단한 후 그 내용을 국민께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매끈하게 보도했다. 고대 그리스 정치인은 말(言)이라는 정치 수단을 통해 시민의 가슴을 움직였다. 한국 언론의 눈물겨운 서비스 정신이 말과 정치의 퇴보에 기여한다고 해도 할 말 없다.
6. 우리에겐 언제나 의병(義兵)이 있었다.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는 한중일 문화를 비교한 저서 ‘풍수화(風水火)’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한국 원형에 없는 반면 일본 원형에는 의병이 없다”고 했다. 우리가 낫다고 주장하진 않겠다. 단, 정부가 못 하면 국민이 한다.
7. 권위, 특히 무능한 정부에 대한 조롱은 작금의 시대정신이다. 번역기 제작자는 대통령 인신공격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 재미도 없이 무슨 수로 세금 바치며 각자도생(各自圖生)하겠나.
9. 그럼에도 박근혜 번역기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건 대통령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남아있다는 의미다. 내가 찍었든 안 찍었든 대통령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착한 국민이라는 점에서, 대한국민 만세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