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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고기 좋아했던 백운거사… ‘牛禁’ 선언은 재상의 체통때문

입력 | 2015-06-15 03:00:00

[우리 역사 속 미식가 열전]쇠고기 끊은 고려 문인 이규보




작자 미상의 19세기 채색화. 한겨울인데도 야외의 외진 곳에서 양반들이 기생과 함께 쇠고기를 몰래 구워 먹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학자는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고려시대 사람들이 육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사실 일반인은 없어서 못 먹었지만, 왕실 식탁에는 불교 교리에 따라 고기 음식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 거란의 위협을 고려의 도움으로 해결해 보려고 1123년(인종 1년) 개경을 찾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고려 왕실이 불교를 신봉해 도살조차 제대로 못 한다고 썼다.

“가축의 수족을 묶어 맹렬하게 타는 불 속에 던진다.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다. 이렇게 한 뒤에 배를 갈라 창자와 위를 모두 빼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 낸다. 국이나 구이를 만들어도 구린내가 없어지지 않는다.”

서긍이 개경을 다녀간 지 110년이 지난 1233년(고종 20년) 고려 재상이 된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 엉뚱한 제목의 시 한수를 지었다. 제목은 ‘단우육(斷牛肉)’, 곧 ‘쇠고기를 끊다’다. “내가 지난번에 오신(五辛)을 끊고서 이를 기념해 시 한 수를 지었던 적이 있다. 그때 쇠고기도 함께 끊었다고 했지만 마음만 그랬을 뿐이었다. 눈앞에 쇠고기가 보이면 바로 먹었으니 어찌 끊을 수가 있었겠는가.”(동국이상국집에 실린 ‘단우육’의 발문)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먹으면 분심을 일으킨다는 마늘·파·부추·염교(해)·흥거(興渠·무릇) 따위의 오신은 물론이고 쇠고기도 끊어야 한다니 말이다. 23세 때 과거에 합격하고도 이규보는 오랫동안 벼슬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의 나이 46세 때인 1213년(강종 2년)이 되어서야 최이의 추천으로 최고 권력자 최충헌의 눈에 들어 단숨에 7품의 고위직에 올랐다.

문제는 이 고위직의 체통이었다. 시는 물론이고 거문고와 술을 좋아해 ‘시금주삼혹호선생(詩琴酒三酷好先生)’이란 별호를 스스로 붙이고 다녔던 이규보에게 쇠고기 안주는 마치 애연가의 담배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어찌 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재상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더욱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상황에서 왕실은 물론이고 그곳의 불교도들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최씨 무신정권의 이데올로그였던 이규보는 쇠고기를 끊는 이유를 불교에 두지 않았다. 소가 사람을 위해 논밭을 갈고 짐도 운반해 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런 주장은 농사를 근본으로 삼았던 고려에서 소를 마음대로 도살하지 못하도록 했던 우금(牛禁) 정책의 이유이기도 했다. 고려의 우금 정책은 조선시대에도 지속됐다.

논농사를 주로 짓던 한강 이남에는 당연히 소가 많았다. 조선의 부자 양반들 가운데 이규보의 심정처럼 눈앞에 소가 있는데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이들이 꽤 많았다. 권력을 가진 양반들은 관청 몰래 잡아먹거나, 한겨울에 ‘난로회(煖爐會)’라는 모임을 핑계로 쇠고기를 먹기도 했다. 심지어 부모님 봉양을 위해 소를 잡겠다고 관청에 요청한 소 주인도 있었다.

요즘 한반도의 소는 노동우(勞動牛)에서 정육우(精肉牛)로 모두 바뀌어 버렸다. 그것도 들판이 아니라 좁디좁은 공장에서 상품으로 만들어진다. 쇠고기를 먹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시성(詩聖) 두보를 이규보는 가소롭다며 비웃었다. 마블링까지 따져 가면서 쇠고기에 집착하는 현대인을 이규보가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