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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425>산에가는이유,의역사

입력 | 2015-06-15 03:00:00


산에가는이유,의역사 ―박의상(1943∼)

산에 갔지
처음엔 꽃을 보러 갔지
새와 나무를 보러 갔지
다음엔 바위를 보러 갔고
언제부턴가 무덤을 보러 갔지

그리고 오늘부터는
저것들 보자고 산에 가지
산 아래 멀리 저어기
강가의 새 도시에
우뚝 선 것들,
번쩍이고 으르렁대는
세상에, 저 예쁜 것들,
야호! 야호!
그래, 어디, 어디,
나, 다시 보자!고





박의상 선생 시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우선 각 행 첫 글자의 위치가 들쭉날쭉해서, 같은 자리에서 시작해 가지런히 배열되는 대개의 시들과 형태가 유다르다. 이제 이런 형태의 시를 ‘박의상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만의 스타일은 특히 예술가에게 중요한 자산이다. 내용에서건 형태에서건 말이다. 그런데 시인이 자기 스타일을 만들자고 줄곧 이리 썼을까? 둘째 행과 셋째 행을 보자. ‘새와 나무를 보러 갔지’를 읽으러 독자는 ‘처음엔’ 아래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몇 글자 사이지만, 찰나라도 빨리 눈에 들어온다. ‘처음엔 꽃을 보러 갔지 새와 나무를 보러 갔지’, 이렇게 한 행으로 펼치기도, ‘처음엔 꽃을 보러 갔지/새와 나무를 보러 갔지’, 이렇게 두 행으로 펼치기도 애매한 지점에서 시인은 민감하게 망설였을 테다. 그래, ‘뭐 행을 꼭 같은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나?’ 민완 시인의 배짱과 감각으로 실력을 행사했을 테다. 그러고 나서 보니 시각적으로도 지루하지 않고, 시의 호흡에서도 더 자유로운 게 아닌가! 시를 쓰는 데에 어디까지나 시인 본인의 재미와 즐거움이 우선인 듯한 시인 박의상이 장난감에 빠진 어린이처럼 언어를 매만지며 시를 도안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긴장의 의도적 해체가 강박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산에 가는 보람이 ‘처음엔’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산 아래 멀리 저어기’ ‘번쩍이고 으르렁대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이란다. 세속이, 일상이, 바글바글 아등바등 살아 있는 것들이 저렇게 예쁠 수가! 나이 먹을수록 세상이 새록새록 예쁘고 정이 간다니, 화자는 한세상 원만하게 잘 산 게다. ‘불우’는 예술가의 큰 자산이지만, 불우가 창궐하는 세상이다 보니 평탄하게 살아와 영혼에 주름 없는 사람의 존재가 고맙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