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청동과 토기를 전하다
미국의 문명사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퓰리처상 수상작인 ‘총, 균, 쇠’의 개정 증보판(2003년)을 내면서 야요이 시대에 선진 농업기술을 갖고 이주한 한국인들이 오늘날 일본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론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DNA 분석이라는 과학적 실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즉, 일본 고대인인 조몬인과 야요이인의 두개골 유전자를 채취해 현대 일본인과 일본에 살던 원주민족 아이누족과 비교 분석해보니 조몬인이 현대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족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 일본인의 유전자는 야요이인 것을 닮았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 유전자가 한국인과도 닮았다는 것.
가혹한 식민 지배와 아직도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의 후안무치를 생각한다면 ‘쌍둥이 국가’라는 말에 불편해하는 한국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일본인도 자신들이 조몬인으로부터 진화해 최소 1만2000년간 독자성을 지켜왔다는 학설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조상이라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사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현장을 돌다보면 다이아몬드 교수의 주장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유적지를 우리는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규슈 열도 내에 위치한 사가(佐賀) 현에서 만나게 된다.
○ “한일은 쌍둥이 국가”
시치다 다다아키 혼마루역사관 관장이 요시노가리 유적을 둘러싼 해자와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울타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요시노가리=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실제로 해양교류학자인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어제 동아일보가 소개한 가라쓰를 굳이 인천으로 비교한다면 요시노가리는 서울이라 할 수 있다.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한 이들이 정주하기 좋은 땅을 찾아 육지로 들어와 정착한 곳이 바로 요시노가리이기 때문”이라며 “이곳에서 일본 고대 문화의 최전성기를 보여주는 야요이 시대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반도인들이 이주해 형성된 야요이 시대 대표적 집단 취락지인 요시노가리 전경. 현재 3세기경의 모습으로 복원돼 역사공원으로 지정됐다. 사가현 제공
문 안으로 들어서자 성 밖을 둘러 판 도랑인 해자(垓子)가 있었고 해자 바깥쪽으로는 끝이 뾰족한 굵은 나무 말뚝으로 만든 울타리가 있었다.
○ 한국인에게도 친근한 옹관묘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출토된 한국식 동검. 당시 요시노가리의 지배층은 한국식 동검과 유리대롱옥 등으로 위세를 드러낸 것으로 추정된다. 시치다 다다아키 씨 제공
공원을 통과하면 ‘내곽(안쪽 테두리)’이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처진 특별한 구역과 만난다.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있어 북내곽, 남내곽이라 불린다. 북내곽 안에는 건물 여러 채가 복원되어 있었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 ‘주제전(主祭殿)’이고 나머지는 제당 망루 등이었다. 2층에는 지배층이 회의하는 모습을, 3층에는 제사장이 제의(祭儀)를 진행하는 모습을 모형으로 꾸며 놓고 있었다.
시치다 관장은 “북내곽은 당시 지배층이 모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회의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고 남내곽은 거주 공간이었다”고 소개했다.
북내곽을 나와 북서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대형 항아리가 두 줄로 묻혀 있는 특이한 곳이 나왔다.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안내원 황성민 씨는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옹관묘열(甕棺墓列)”이라고 했다. 일부 항아리 안에는 뼛조각이 그대로 있는 것도 있었다.
옹관묘는 초벌구이한 대형 토기에 시신을 구부려 넣고 흙 속에 묻는 매장 방식으로 우리나라 마한 지역에서 유행하던 장례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마을 공동체 안에 이와 같은 매장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준다고 했다.
1990년대 초 옹관묘 발굴 당시 현장을 볼 기회가 있었다는 윤명철 교수는 “옹관묘는 지금으로 따지면 하이테크놀로지 기술이 응집된 초호화판 무덤이었다. 그만큼 지배층의 힘이 강했다는 것”이라며 “먹고 사는 공간에 묘지가 함께 있다는 것은 공동체가 부족 수준이 아니라 초기 국가 형태로 본격적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 한국은 문명 전수자, 일본은 매개자
공원 안 유물 전시실로 발길을 옮겼다. 논농사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가져온 농경사회 변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있었다.
보통 벼를 재배하면 생활시스템이나 경제활동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종자 선택, 모 키우기, 물 대기, 피 뽑기, 벌레 제거하기, 비료 주기, 수확하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가래나 괭이 같은 목제 농기구가 필요해지고 이를 만들기 위한 돌도끼 돌자귀 대팻날 같은 도구와 돌칼이나 돌낫 등 수확용 도구도 필요해진다. 요시노가리 유물전시실에도 이런 다양한 유물이 있었다.
시치다 관장은 이런 유물들이 한반도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고 했다. “야요이 시대 유물들에서는 수렵 채집 시대와는 다르게 저장용 단지, 취사용 항아리, 음식용 굽다리 접시 등이 많이 나왔는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해 한반도에서 전파된 농경문화 요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 유물에서도 한반도계 토기가 출토됐는데 당시 청동기 주조 기술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고급 기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청동기 주조 기술을 가진 한반도인이 요시노가리에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같은 문명 교류에 대해 서울시립대 정재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전했다는 것만 강조하며 우위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각자의 문명 전환기에 상대방에게 매개자 또는 촉매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일본의 선사 고대 시대에는 한국이 중국 문명을 전한 전수자(傳授者)였고, 한국 근현대 문명 형성기에는 일본이 서구 문명의 매개자(媒介者) 역할을 했다. 고대 문명 교류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본격적인 벼농사로 농경 및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일본 문화의 원점’이 시작되는 시대이다.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이 시대 토기(사진)가 처음 발견된 도쿄 외곽 지명에서 유래했다.
요시노가리=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 3회는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한 백제 왕인박사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