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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김재영]문종의 ‘수륙재’

입력 | 2015-06-16 03:00:00


김재영 경제부 기자

문종 1년(1451년) 4월 경기 교하, 원평 등지에 전염병이 퍼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악질(惡疾)’이라고 표현된 걸 보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신종 전염병이었지 싶다. 조정은 급히 중앙의 의원과 약재를 현장에 급파했다. 개성부의 활민원(活民院)을 수리해 ‘중점치료병원’으로 삼았고, 토담집을 지어 환자를 모아 치료했다. 하지만 9월이 되도록 병세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답답한 문종은 ‘수륙재(水陸齋)’를 지내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도승지를 불러 은밀히 임금의 뜻을 전했다. 유학을 신봉하는 나라에서 ‘군주가 괴이한 의식을 먼저 발의했다’는 논란이 나오지 않도록 대신들이 발의하는 형식을 취하게 했다.

신하들의 반대는 거셌다. 대사헌 정창손은 “전염병이 귀신 때문이란 말씀이냐”며 상소를 올렸다. “국가에서 불교의식으로 백성의 병을 구하려 한다면 민심이 더욱 현혹되고, 불법이 더욱 성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있었다. ‘아직 사족(士族)에게까지 전염되진 않았다’는 한가한 얘기까지 나왔다.

임금인들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병이 달아난다고 믿었을까. 전염병의 확산이 사람 간 접촉 때문임을 알고, 환자들을 무인도에 격리하는 방안까지 생각했던 그였다. 문종은 “대개 양의(良醫)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환자의 마음부터 다스리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며 “인심이 흉흉하고 답답해하기 때문에 우선 그 마음을 위안하려는 것”이라고 신하들을 설득했다. 문종은 공포에 휩싸인 백성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로부터 564년이 훌쩍 지난 2015년 대한민국에서는 정부의 다스림이 옛날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메르스 확산 초기 정부는 국민들의 불안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듯하다.

한동안 어느 지역, 어느 병원에서 환자가 발생했는지 국민들은 정확히 알지 못했고 막연한 공포가 퍼져 나갔다. 정부는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는 대신 “무조건 지시만 따르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 지시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다. 사람에 따라서도 말이 달랐다. 불안한 국민들은 닥치는 대로 정보를 모으고 교환했다. 그러자 정부는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했다. 신종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을 비이성적인 반응으로 깎아내렸다.

돌아보면 정부는 대중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깊이 헤아리고 국민이 막연한 공포를 벗어던질 수 있도록 성의 있게 정보를 공개해야 했다. 정부에 대한 신뢰라는 ‘심리적 방역’에 실패한 후유증은 메르스 사태가 잠잠해지더라도 한동안은 계속 될 것 같다.

다시 문종 얘기다. “궁벽한 향리의 백성들이 이 같은 조치(수륙재)를 보게 되면 반드시 국가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속에 위안을 얻어 병도 따라서 그치게 될 것이다. 가령 이 일이 이치에 어긋난다 해도 백성을 위해 거행하는데 무엇이 부끄러우랴.” 이듬해 전염병도, 민심도 잠잠해졌다.

김재영 경제부 기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