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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호 전문기자의 안보포커스]안보 외교전에 적극 나서라

입력 | 2015-06-17 03:00:00


윤상호 전문기자

“카터 씨(Mr. Carter), 당신의 비판은 근거 없고(groundless) 비건설적(unconstructive)입니다….”

지난달 30일 제14차 아시아 안보회의가 열린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의 대연회장. 중국 군사과학원의 자오샤오줘 대교(대령)가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을 날선 어조로 공격했다. 카터 장관이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을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으로 기조연설을 끝낸 직후였다. 자오 대교는 되레 미국의 군사 정찰활동이 남중국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카터 장관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중국의 전례 없는 남중국해 활동이 대단히 우려스럽다”며 “미국의 남중국해 정찰초계활동은 계속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미 국방수장과 중국군 장교의 ‘설전’은 단연 화제가 됐다. 수백 명의 취재진들은 이를 주요 뉴스로 앞다퉈 보도했다. 주요 2개국(G2·미국 중국)의 남중국해 기싸움은 이대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 날 중국의 반격이 이어졌다. 쑨젠궈 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상장)은 기조연설에서 “남중국해 간척사업은 정당한 주권 행사로 외부의 압력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한 의사를 밝혔다. 미국이든 누구든 더는 중국의 남중국해 활동에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경고로 들렸다.

이를 지켜본 취재진들은 ‘총성 없는 전쟁’이 따로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조용한 전쟁’은 미중 대결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20여 개 참가국 국방당국자와 안보전문가들도 회의장 곳곳에서 열띤 ‘안보 외교전’을 펼쳤다.

본회의장인 대연회장은 물론이고 호텔 로비와 커피숍, 크고 작은 회의실은 그 전장(戰場)이었다. 각국의 국방당국자들은 전문가와 언론을 상대로 자국 안보정책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지지를 얻느라 여념이 없었다. 군사적 신뢰구축과 안보협력이라는 행사 취지가 무색할 만큼 안보 국익의 극대화에 ‘다걸기(올인)’하는 모습이었다. 외교는 또 다른 전쟁이라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절감했다.

‘샹그릴라 무대’의 주인공은 단연 미국과 중국이었다. 남중국해 문제 등 역내 안보 현안에 대한 두 강대국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목이 집중됐다. 일본도 ‘주연’ 자리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은 기조연설에서 자국의 안보법제 개정안과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이 역내 안정과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더이상 미국의 등 뒤에서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머물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지난해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기조연설에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 필요성을 제기한 ‘아베 독트린’을 발표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이번 회의에서 한국은 4년 만에 일본과 국방장관 회담을 갖고 집단적 자위권의 한반도 적용 원칙에 합의했다. 이어서 열린 한미일 3국 국방장관회담에서 북핵 공조도 재확인했다.

하지만 이 같은 회담 성과는 우리 기대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회의장에서 만난 해외 취재진들은 “한국처럼 중요한 나라가 왜 기조연설을 하지 않느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북핵 문제의 핵심 당사국이 국제사회에 자기 나름의 원칙과 해법을 제시하고, 북핵 여론을 리드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허비하는 게 의아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에게 “한국의 대주변국 관계는 다른 나라보다 더 복잡하고 민감하기 때문”이라고 답하면서도 궁색하게 들리지 않을까 곱씹어봤다.

한국은 2010년(이명박 대통령)과 2011년(김관진 국방부 장관) 이후로 샹그릴라 회의에서 공식 연설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김 장관이 싱가포르 국방장관 주최 비공식 오찬행사에서 연설을 했을 뿐이다.

한국이 한반도와 역내 안보 현안을 주도하려면 국제무대에서 ‘발표력’을 더 길러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국방정책에 대한 각국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표심(票心)을 얻는 작업을 외면하거나 게을리 해선 안 된다는 얘기다.

국제 안보외교 무대에서 침묵은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 한국이 과묵한 태도를 고수할수록 발언대는 그만큼 쪼그라들 가능성이 높다. 샹그릴라 회의는 세계 각국이 한국의 목소리를 경청할 준비가 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자리였다. 더 늦기 전에 한국이 국제사회의 기대와 관심에 화답해야 할 때라고 본다. 그것은 한반도를 포함한 역내 안보외교의 주도국이란 위상을 높이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윤상호 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