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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구의 옛글에 비추다]구밀복검

입력 | 2015-06-17 03:00:00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여우란 놈은 늘 호랑이에게 아첨을 하였다. 호랑이는 그게 좋아 먹고 남은 것을 여우에게 주었고, 여우는 이게 탐나 더욱더 아첨을 하였다. 어느 날 여우가 말하였다. “호랑이님을 모두 산중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왕도 물론 높긴 하지만 왕 위에는 황제가 있어 이보다 높은 존재가 없습죠. 호랑이님을 황제라고 불러서 천하에 존귀함을 보이시는 게 어떨지요?” 호랑이의 대답. “아니다. 기린은 나보다 어질지만 황제라고 부른다는 말을 못 들었고, 사자는 나보다 용맹스럽지만 황제라고 부른다는 얘길 못 들었다. 나는 왕으로 불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무슨 덕이 있다고 황제란 이름을 감당하겠느냐?(王於我足矣, 而帝以何德堪之.)”



조선 후기 문인 이하곤(李夏坤) 선생의 ‘두타초(頭陀草)’에 수록된 ‘아첨하는 여우 이야기(媚狐說)’입니다. 등장하는 동물이 여우와 호랑이라 ‘호가호위(狐假虎威)’와 비슷할 것 같은데 내용은 많이 다릅니다. 게다가 호랑이의 반응이 뜻밖에 매우 훌륭합니다. “허허, 내가 무슨 덕이 있다고.” 이런 겸손한 자세, 참으로 바람직합니다.



여우가 말하였다. “기린이 어질다지만 용맹은 호랑이님만 못합죠. 사자가 용맹하다지만 어진 것은 호랑이님만 못합니다. 어짊과 용맹을 호랑이님께서는 겸하고 계시니, 저 두 동물이 어떻게 호랑이님을 바라볼 수나 있겠습니까? 온전한 덕을 갖추신 호랑이님께서 황제가 안 되신다면 누가 황제가 되겠습니까?” 이에 호랑이가 기뻐하며 마침내 자신을 황제로 부르라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온갖 짐승들이 모두 와서 경하하였다. 호랑이는 여우가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여겨 여우를 ‘산중 재상(山相)’이라 불렀고, 먹을 것이 생기면 먹지 않고 모두 여우에게 주었다.



의연해 보이던 호랑이도 결국 여우의 교묘하고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가고야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이렇습니다.



“여우가 호랑이에게 아첨한 것은 호랑이의 먹이가 탐나서였을 뿐이다.(夫狐之媚虎, 由乎利虎之담而已.) 그런데 호랑이로 하여금 여우가 자기를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믿게 만들었으니, 여우는 참으로 아첨을 잘하였다고 하겠다.”



달콤하게만 들리는 세상의 모든 아첨에는 나를 노리는 칼날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조경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