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투기자본 한국 공습]<1>제2의 삼성물산사태 우려
《 국내 30대 그룹 소속 186개 상장계열사 중 대주주 우호 지분(이하 10일 기준)이 외국인 지분보다 적은 기업이 14곳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17일 발표한 분석 결과다. 외국인 지분이 높다고 무조건 경영권을 위협받는다고 보긴 힘들다. 하지만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 같은 ‘벌처 펀드’들이 취약한 지배구조의 틈을 소리 없이 파고들 수 있다는 점에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엘리엇이 경영 간섭에 나선 삼성물산은 대주주 및 우호 지분이 13.99%, 외국인 지분이 33.79%였다. 7.12%를 가진 엘리엇이 “주주 이익 우선”을 앞세워 외국인 투자자 규합에 나설 경우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임시주주총회에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수치다. 삼성물산은 어쩔 수 없이 11일 KCC에 자사주 5.76% 전량을 매각하면서 경영권 방어에 나섰다. 또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와 크레디트스위스를 자문사로 선정해 엘리엇의 공세에 대응키로 했다. 》
SK그룹에서는 SK하이닉스가 대주주 우호 지분(20.77%)보다 외국인 지분(53.22%)이 32.45%포인트나 높았다. SK텔레콤 역시 외국인 지분(44.54%)이 대주주 우호 지분(25.22%)을 크게 앞질렀다. 신세계그룹에서는 이마트와 신세계의 외국인 지분이 대주주 우호 지분보다 각각 25.74%포인트, 16.76%포인트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해외에서는 오너가(家)가 소수 지분만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페섹이 최근 칼럼에서 “엘리엇은 수익을 노린 ‘먹튀’일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일가의 그룹 지배력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외국인 투자자 비율이 높으면 국내 대기업 오너 일가의 상속 및 증여를 위한 사업구조개편이나 유상증자 등에 언제든 제동이 걸릴 수 있다. 대주주 우호 지분(31.23%)과 외국인 전체 지분(30.99%)이 비슷한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해 2대 주주(21.5%)인 스위스 쉰들러홀딩AG가 사사건건 경영활동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자산가치에 비해 주가가 낮은 이른바 ‘저(低)주가순자산비율(PBR)’ 기업들도 ‘자본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벌처펀드들은 대부분 표면적으로 낮은 주가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논리를 펴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물산처럼 그룹 지배구조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기업들은 경영권 이슈에 더욱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NH투자증권이 국내 100대 기업(16일 시가총액 기준)을 조사한 결과 38개 기업의 PBR가 1 미만이었다. 특히 우리은행, 하나금융지주, 한국가스공사, 롯데쇼핑, 포스코, 기업은행, 한국전력, 현대자동차, KB금융, 대우조선해양 등 10곳은 PBR가 0.5 이하였다.
삼성물산의 PBR는 0.8이다. 조윤호 동부증권 연구원은 “삼성물산의 외국인 지분이 연초부터 많이 올라가는 것(1월 2일 27.70%→6월 17일 33.49%)을 보면서 적잖은 리스크가 되겠다 싶었다”며 “특히 삼성물산은 제일모직처럼 오너 지분이 높지 않아 엘리엇의 좋은 타깃이 됐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 벌처펀드(vulture fund) ::
동물의 시체까지 뜯어먹는 독수리(벌처)에 빗댄 것으로 수익을 위해서는 어떤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투기자본을 일컫는다.
김창덕 drake007@donga.com·김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