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산이라고 얕보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절벽과 기암괴석, 암벽 등 있을 건 다 있는 재미있는 산입니다.”
하루 입장객 수를 제한하는 곰배령 예약에 실패하고 다시 고른 산은 강원도 홍천에 있는 팔봉산(八峰山)이다. 등산에 조예가 깊은 한 선배가 팔봉산을 추천하면서 위와 같은 설명을 곁들였다.
팔봉산은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8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붙어 있다. 최고봉인 제2봉이 해발 327미터로 그리 높지 앉지만, 기암과 절벽 사이로 등산로가 나있고 로프에 의지해야할 만큼 급경사도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
오늘의 등반은 1봉에서 출발해 8봉까지 차례로 봉우리를 넘는 제1코스를 선택했다. 팔봉산에서 가장 긴 코스다. 안내판의 평균 등반시간은 대략 2시간30분이었지만, 모처럼 시간에 쫒기지 않고 전망을 즐기며 쉬엄쉬엄 오르기로 했다. 완주 목표 시간은 3시간.
팔봉산은 주차장에서 보면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맑은 홍천강 너머로 고만고만한 여덟 개의 뾰족한 봉우리가 사이좋게 늘어서 있는데, 강과 잘 어우러져 계절마다 근사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1봉을 지나 2봉에 다다르면 정상에 작은 당집이 있다. 바로 삼부인당인데, 전해오는 얘기로는 삼부인신(三婦人神)은 시어미니 이(李)씨, 딸 김(金)씨, 며느리 홍(洪)씨 신(神)을 지칭한다. 이씨 부인은 마음이 인자했고, 김씨 부인은 마음이 더욱 인자했는데, 홍씨 부인은 너그럽지 못했다. 그래서 당굿을 할 때 이씨가 강신하면 풍년, 김씨가 강신하면 대풍이 드는데, 홍씨가 내리면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굿을 할 때마다 김씨 부인신이 내려주기를 빌었다. 지금도 등산로와 붙어 있는 당집에는 항상 촛불과 향이 켜있고 재단에는 재물이 정갈하게 놓여져 있다. 지나는 등산객들이 두 손 모아 삼부인신에게 복을 비는 모습은 언제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3봉을 지나 4봉에 오르기 전 하늘로 향한 작은 구멍 같은 굴이 있다. 옆으로 로프 등산로가 개설되기 전까지 이 굴은 봉우리로 가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다. 따라서 이 굴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데 아래에서 보면 ‘과연 성인이 저 작은 굴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좁아 보였다. 일행 8명 중 3명만이 굴에 도전했다. 먼저 기자가 출발했다. 굴에 다가갈수록 더욱 좁아져 나중에는 구멍이 A4용지 1장 크기만큼 작게 보인다. ‘굴에 끼어서 오가도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함께 엎드린 자세로 도전했는데, 아무리 발버둥쳐도 혼자서 통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깨가 바위틈에 끼이고 발을 디딜 곳도 없었다. 결국 일행이 손을 잡아줘 간신히 굴을 빠져나왔다.
웃고 떠들며 봉우리를 넘는 사이에 어느덧 7봉에 이르렀다. 일행 중 한 명이 봉우리를 넘을 때마다 나이를 10년씩 먹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7봉은 70세란다. 방금 1봉에서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7봉까지 온 것이다. 인생도 이처럼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고 생각하니, 슬며시 어깨가 처졌다.
7봉에는 부처바위가 있는데 세파에 찌든 중생들이 이곳에서 정성을 드리면 잡념을 털어내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산할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팔봉산은 오르락내리락 경사가 심하고 험하지만, 전체적으로 코스가 짧아 등반이 수월했다. 쉬엄쉬엄 봉우리는 넘다보면 어느새 8봉에 다다른다. 8봉의 평평한 바위에 앉아 잠깐 땀을 식힌 뒤 하산 길에 올랐다. 급경사를 10여분 내려오자 바로 홍천강변에 도착했다. 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면 처음 출발했던 등산로 입구와 만난다. 하지만 우리는 가뭄으로 물이 준 홍천강을 바로 건너 주차장으로 가기로 했다. 깊은 곳이 수심 50~60cm이고, 폭은 30여m에 불과한 강을 가로질러 반대편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때 시간은 낮 12시를 지나고 있었다. 총 등산시간은 3시간 남짓. 중간에 멈춰서 경치를 구경하고 간식을 먹으며 느릿느릿 걸어도 이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만약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면 1시간30~40분이면 1~8봉까지 완주할 것으로 생각된다.
팔봉산은 낮지만 험한 암벽에 경사가 심해 곳곳에 추락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90년대까지 추락사고가 빈번해 등산객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한 노인이 산의 음기가 너무 세서 사고가 자주 발생하니 이를 다스려 보라고 권했다. 주민들과 관리사무소는 힘을 합쳐 남근목과 남근석을 입구에 세워 음기를 중화시키고, 장승으로는 돌아가신 혼령을 달래니 거짓말처럼 사고가 줄었다고 한다.
바위가 많은 산을 오를 때 무엇보다 중요한 장비는 등산화다. 돌에 부딪혀도 발을 충분히 보호하는 단단한 것이 좋다. 하지만 이날은 거꾸로 부드러운 것을 선택했다. 산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인데, 바위산을 생각하면 충격을 막아주는 딱딱한 것이 좋지만, 코스가 짧고 강물에도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전천후 신발을 신었다. 바로 워터슈즈 ‘메가벤트’다.
메가벤트는 중창인 미드솔에 물 빠짐 구멍이 있어 배수가 잘 되고, 바닥 창의 접지가 좋아 가벼운 등산은 물론 계곡 트레킹, 휴가철 물놀이 등에도 적합하다. 또한 바닥 안창의 수많은 바람구멍인 벤트(Vent) 홀이 통풍 효과를 발휘해 여름철 아스팔트로 덮인 뜨거운 도심에서 일상화로 활용할 수도 있다. 신발 갑피도 메시 소재로 만들어져 바람이 잘 통한다. 이 신발은 트래킹이나 가벼운 산행에 적합한데, 물 속을 거닐다가 바로 물 밖으로 나와 트레킹, 경등산 등을 즐길 수 있다.
홍천강을 건너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12시10분이다. 이날 등산은 역대로 가장 느리게 걷고 가장 많이 쉬었다. 모두들 아직 기운이 쌩쌩하고, 뭔가 미련이 남는 듯한 표정이다.
“벌써 내려왔네요. 뭔가 좀 싱겁지 않아요?”, “그럼 한 번 더 올라갔다 올까?”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다음에 좀 더 센 산을 가요. 그래야 땀도 제대로 흘리고 스트레스도 확 풀죠.”
몇 마디 대화가 오가면서 얼떨결에 다음 산행 목표가 설악산으로 정해졌다. 벌써부터 험악한 공룡능선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땀으로 범벅돼 일그러진 동료들의 표정이 그려진다. ‘아! 뜨거운 여름에 공룡능선이라니, 초보자들이 많은데 과연 가능할까?’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