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 투톱 김기춘-김재원 체제서 가만히 있는게 몸에 밴 與 인사들 돌격대장 사라지자 방향감각 잃어 어공들 ‘관료에 포위된 靑’ 한탄하고 관료는 “정부 목표 헷갈린다” 항변
이재명 기자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청와대 집무실 책상에는 영어로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2013년 비서실장을 맡을 때 그의 나이 74세였다. 김 전 실장은 시스티나 성당 벽화나 파우스트를 남기진 못했지만 당정청 장악력의 진수를 보여줬다.
당시 정치권은 ‘김기춘-김재원(당시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현 대통령정무특보) 라인(일명 K-K라인)’이 좌지우지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번 공무원연금 개혁안과 국회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 불거진 ‘대통령의 의중 논란’ 같은 일은 당시 상상할 수도 없었다. 대통령의 뜻이 궁금하다면 김 원내수석의 말에 귀 기울이면 됐다.
그만큼 ‘K-K라인’은 견고했고 당청은 일사불란했다. 역설적으로 조윤선 전 대통령정무수석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K-K라인’이 가동될 때 조 전 수석의 주요 업무는 어떤 법안이 언제 통과될지 보고하는 수준의 ‘정무 행정’에 그쳤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은 듯싶다. 외교관 출신을 기용한 데서 알 수 있듯, 박 대통령의 정무수석 인사 콘셉트는 ‘가만히 있어라’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올해 1월 지지율이 급락하자 김 전 실장을 내보내야 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급하게 국무총리로 차출했지만 ‘70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비박(비박근혜)계 유승민 원내대표의 당선으로 당청 핫라인은 사라졌다. 드디어 조 전 수석이 진짜 정무수석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초선 의원 출신인 조 전 수석이 당 지도부를 움직이는 데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이후 여야 협상 때마다 당청은 삐걱댔다. 툭하면 당청 간 ‘진실게임’이 벌어지면서 청와대는 야심한 밤 언론사에 전화를 돌려 여론전을 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청 간 잇단 잡음은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의 입지마저 약화시켰다는 게 중론이다.
여권의 강고한 파이프라인이 부식된 상황에서 우병우의 민정수석실은 감찰의 칼날을 벼렸다. 지난해 말 ‘정윤회 동향 문건’ 유출 파문 이후 벌어진 일이다. ‘감찰 정국’에서 청와대 인사들의 생존전략은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주요 타깃이 된 어공(어쩌다 공무원·대선 캠프나 국회 보좌진 출신 행정관)들이 떠난 빈자리는 정통 관료들로 채워졌다.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을 민원비서관으로 발탁하는 등 내부 인사는 점점 오묘해졌다.
청와대의 한 줌 남은 어공들은 관료에 포위된 청와대의 현 상황을 한탄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의 진도 방문을 두고 관료 출신들은 “대통령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이번 메르스 행보를 두고도 관료들은 “괜히 불안을 키울 수 있다”며 반대 논리를 폈다.
그렇다고 모든 게 관료의 잘못인가. 청와대 파견 관료의 항변을 들어보자. “정부의 목표만 분명하면 오히려 관료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한다.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이나 자원외교가 그랬고, 노무현 정부가 지방분권 정책을 추진할 때도 많은 관료가 총대를 멨다. 하지만 현 정부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지금도 헷갈린다.”
메르스 사태는 현 정부의 국정운영 능력에 근본적 회의를 품게 했다. 무엇을 하든 비난을 받자 청와대는 점점 강경해지고 있다. 외부의 적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적은 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