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갈등은 일시적이 아니라 다변화 장기화 구조화의 길로 일본은 가해의 역사에 겸허하고 한국은 피해의 역사를 극복해야 그나마 ‘새로운 관계’ 가능 중국의 대두와 국제질서 재편, 양국 국익 부합하는 공조 분야들 한일, 새로운 50년이 필요한데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하고 있다
심규선 대기자
지난주 제주도 하얏트호텔에서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국제학술행사가 열렸다. 조태열 외교부 제2차관의 축사 중에서 그의 회고담이 귀에 들어왔다.
“1979년 여름, 한일 대륙붕 공동 개발에 관한 실무협의가 있던 날, 생전 처음 참석하는 정부 간 회의라 설레는 마음으로 회의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회의를 일본어로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견딜 수가 없어 회의장을 나와 버렸다. 그날 저녁 일본 대사관저에서 리셉션이 열렸는데, 학자풍의 한 중년 신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스노베 료조 대사였다. 그는 ‘당신의 기분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워낙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는 회의라 서로 편한 언어로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니 양해해 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잠시 후 그가 마이크를 잡고 인사말을 하는데 텍스트도 없이 또렷한 한국말로 하는 데 놀랐다. 분명 나에 대한 위로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숱한 전문가들의 다양한 주장을 명쾌하게 정리할 능력은 없다. 다만, 여러 곳에서 들은 그들의 주장에는 다섯 가지 정도의 공통점이 있었다. 한일 미래 50년을 위한 일종의 제언이다. 나도 동의한다.
일본은 제국주의에서 영광을 찾지 말고 패전 이후의 성공과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전쟁은 화려한 회고의 대상이 아니라 진솔한 사과의 대상이다. 일본이 과거사에서 예전의 배려와 여유를 회복한다면 더이상 작아질 이유가 없다.
한국은 사죄 요구 외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기여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의 성장을 가장 확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며, 일본도 예전의 고분고분한 일본이 아니다. 이를 솔직하게 수용한다면 한국은 도덕적 우위를 지킬 수 있다.
국제사회는 두 나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와 인권을 공유하는 ‘쌍둥이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양국 간, 아시아에서, 국제사회에서 협력할 일은 여전히 많다. 한일의 협력 모델은 ‘국제사회의 공공재’가 될 수 있다.
한일은 어떤 관계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 가장 많이 나온 말이 ‘새로운 관계’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예전의 특수 관계로 되돌아가기는 힘들다. 평상적 국가 대 국가로서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세심하게 관리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변화를 연착륙시키는 데는 정치적 리더십과 결단이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는 그간 이런 요구에 냉담했다. 그들이 오늘 저녁 수교 5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한다는 것은 갈등의 쉼표를 기대할 만한 의미 있는 행보다. 한일관계를 중시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딸과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손자로서 역사의 무게를 느끼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양국 언론도 내셔널리즘으로 무장한 선수가 아니라 냉철한 심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뼈아픈 지적을 들었다.
한국은 아프지만 넘어서야 할 과거와, 일본은 화려하지만 잘못됐던 과거와 결별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양쪽 모두 미래라는 이름으로…. 누구도 밝은 미래를 장담하지는 못했지만, 과거로부터의 변신은 한목소리였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