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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新명인열전]“헌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눔이죠”

입력 | 2015-06-22 03:00:00

<15>헌혈책 펴낸 이은정 간호사




 《 “혈맹, 혈서, 혈연. ‘피는 물보다 진하다’. ‘피로써 맹세한다’. ‘피를 나눈 형제’”피는 진하고 끈끈하다. 피는
따뜻하다.이은정 간호사(43·전북 전주시)는 23년째 대한적십자사 전북혈액원에서 피를 다루고 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증된 ‘아름다운 피’만을 봐왔다. 그는 ‘피는 영혼이다’고 말한다. 헌혈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눔’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최근 펴낸 책 ‘헌혈, 사랑을 만나다’(도서출판 행복에너지)에는 그가 현장에서 만난 ‘유난히 따뜻한 피를 가진
사람들’의 얘기가 가득하다. 최근 메르스(중동호흡기중후군)확산 여파로 군부대와 학교 등의 단체 헌혈은 물론이고 개인 헌혈까지 크게
줄고 있어 그의 이야기가 더욱 눈길을 끈다. 》



23년간 전북혈액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헌혈 업무을 해 온 이은정 간호사가 그동안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담은 자신의 책 ‘피는 영혼이다’를 들고 환하고 웃고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눔, 헌혈

가영이 엄마는 딸의 수술 하루 전날이면 늘 헌혈의 집을 찾는다. 엄마로서 하나뿐인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한스러우면서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헌혈을 한다. 가영이는 유치원에 다닐 때 아빠차를 타고 가다 큰 사고를 당했다.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했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 수술과 재활이 이어졌다. 그녀에게 헌혈은 딸의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나기를 바라는 기원이며 그동안 딸이 받은 그 많은 피에 대한 보답이다.

어느 일요일 아침, 헌혈의 집 문이 열리기도 전부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의 팔에는 유난히 자해 흔적이 많았다. 젊은 시절 가진 것 없는 부모를 원망하고 소아마비 장애가 있는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면서 생긴 상처였다. 수년 전 식당일을 하던 홀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오다가 덤프트럭에 치여 숨졌다. 어느 날 헌혈 캠페인 방송을 보다 어머니 수술 당시 피가 부족해 마음을 졸였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이후 그는 틈날 때마다 헌혈의 집을 찾는다. 그에게 헌혈은 어머니에 대한 속죄다.

헌혈의 집에 자주 찾아오는 대학생이 있었다. 긴 머리가 멋있어 간호사들 사이에 ‘테리우스’로 불리던 잘생긴 학생이었다. 어느 날 이 학생이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났다. 사연을 들어보니 소아암을 치료 중인 아이들의 가발을 만드는데 자신의 머리카락을 기증했다는 것이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 머리카락을 기증하려면 머리카락 길이가 12cm는 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머리를 일부러 기른 것이었다.

전직 공무원 손홍식 씨(65·광주)는 지금까지 707차례 헌혈을 했다. 한 번에 400cc 안팎의 피를 뽑았으니 그가 지금까지 헌혈한 피는 어림잡아 30만 cc를 넘는다. 성인 남성 70명분의 피에 해당한다. 헌혈은 일년에 24회로 제한돼 있으니 32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헌혈을 한 셈이다. 그는 헌혈을 ‘이웃과 나를 위한 저축’이라고 말한다. 건강한 사람만이 헌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헌혈을 하기 위해 몸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혈액원에서는 100회 이상 헌혈한 사람들을 ‘헌혈 레드카펫 명예의 전당’에 모시고 있다. 현재까지 명예의 전당에 오른 사람은 8295명이다.

○ 헌혈은 아름다운 중독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헌혈이 시작된 것은 4·19혁명 때였다. 독재에 항거하던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총상을 입고 긴급 수혈이 필요하게 되자 의사와 간호사 의대생들이 팔을 걷었고 이 소식을 들은 수많은 시민들의 헌혈 대열이 장사진을 이뤘다. 6·25를 겪고 1954년 국립혈액원이 개원했지만 소요량의 대부분을 매혈에 의존해야 했다. 당장 돈이 궁한 사람들이 싼값에 피를 팔았고 이 피를 모아 의료기관 등에 파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시 한 번 피를 뽑아 팔면 1000원 안팎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일자리도 벌이도 없던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돈을 구할 수 있는 길이 매혈이었다. 그 이후 일부 의과대학에서 헌혈운동이 일어났고 서울 신촌에 헌혈의 집이 처음 생긴 것이 1973년이었다. 10년 뒤인 1983년이 돼서야 헌혈만으로 국내 혈액 수요량의 100%를 충당할 수 있게 됐다.

적십자사는 지난해 12월 ‘헌혈 300만 시대’를 돌파했다고 선언했다. 한 번이라도 헌혈을 한 사람이 300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5000만 인구로 볼 때는 6%에 불과하다. 100명당 6명 정도가 한 번이라도 헌혈을 해본 셈이다. 여전히 헌혈은 ‘하는 사람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다.

헌혈자를 직업별로 보면 여전히 학생(55%)과 군인(14%)의 비율이 높다. 학생들은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군인들은 단체 헌혈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연령대별로도 16∼29세 비율이 78%나 된다. 일본과 서구사회는 청년층보다 중장년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남성과 여성의 성비불균형(7 대 3)도 문제다. 여성들은 헌혈을 하려 해도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이어트로 인한 빈혈도 흔하다.

과거 역이나 터미널 앞에서 헌혈을 권하며 버스 안으로 손목을 잡아끌던 모습도 이제 사라졌다. 전국 100여 개의 헌혈의 집은 산뜻한 카페 분위기다. 헌혈하고 나면 영화 티켓도 준다.

“부모가 헌혈을 하면 자녀도 헌혈에 대한 인식이 좋아져 헌혈 대열에 동참하게 되죠. 만 16세가 넘어야 헌혈을 할 수 있지만 어릴 때 엄마아빠 손을 잡고 헌혈의 집에 와본 아이들은 커서 자연스럽게 헌혈을 하게 됩니다.” 이 씨가 책을 쓰는 동안 그의 고교생 아들도 첫 헌혈을 경험했다. 이 책의 인세는 전액 헌혈진흥기금으로 기부된다.

김광오 기자 ko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