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 뿌리부터 바꾸자]<상>‘문단 카르텔’ 3대출판사 폐해
《 표절 논란에 휩싸인 소설가 신경숙 씨(52)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후폭풍은 오히려 거세졌다. 신 씨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힌 것에 대해 ‘사과 아닌 말장난’이란 비판이 잇따르고 있는 것. 23일 열린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 주최 긴급토론회에서도 의식적이고 명백한 표절이라는 의견들이 나왔다. 기획 시리즈를 통해 우리 문단이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와 대안을 찾아본다.
한국문학이 어느 때보다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 씨의 표절 논란 사태가 불거지면서다. 신 씨는 22일 표절한 것으로 지목된 소설 ‘전설’에 대해 “출판사와 상의해서 ‘전설’을 작품집에서 빼겠다”며 “문학상 심사위원을 비롯해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절필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출판사 창비는 “‘전설’이 실린 소설집 ‘감자 먹는 사람들’의 출고를 정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신 씨 개인이 아닌 한국문학의 구조적 문제를 들추는 계기가 됐다.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가 23일 서울 마포구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개최한 긴급토론회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문학 권력의 현재’에 참석한 발제자들은 오늘의 한국문학의 위기를 지적하면서 “문단의 패거리화, 권력화로 빚어진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
23일 서울 마포구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 공동주최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긴급토론회에서 발제자와 토론자들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총장 조영선 변호사,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정원옥, 이명원 경희대 교수, 사회자 이동연 문화연대 집행위원장, 오창은 중앙대 교수, 심보선 시인, 정은경 원광대 교수.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정우영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은 토론회에 앞선 인사말에서 이렇게 밝혔다. 한국문학의 ‘썩은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이 문단 내부에서도 공유됐다는 뜻이다.
23일 긴급토론회 참석자들은 한국 문학권력을 정조준하면서 비판적인 발언들을 쏟아냈다. 오창은 중앙대 교수는 ‘신경숙 표절 국면에서 문학권력의 문제’를 주제로 ‘전투적인 평론가’들의 끊임없는 지적에도 신경숙 표절을 옹호한 문학권력의 폐쇄성을 비판했다. 그는 “문학권력 내부에서 작가 양성과 매체 발간, 문학상 수여와 단행본 발간까지 이뤄지다 보니 독자와의 관계보다는 내부적 질서가 우위에 놓이게 된다”며 “이 질서의 ‘신화적 상징’이 바로 신경숙 문학”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면서 “출판자본의 이익만 우선시하는 출판사가 자신만의 문학적 색채를 가지려는 노력부터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교수가 말하는 문학권력은 이른바 3대 주요 문학출판사인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를 가리킨다. 이 출판사들이 단순히 문학 단행본을 많이 내서 문학권력으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각각 출간하는 문예지 ‘창작과비평’, ‘문학동네’, ‘문학과사회’가 한국문단의 ‘권력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들 문예지에 편집위원으로 소속된 평론가들이 각 사에서 출판되는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작가의 명성을 굳히는 요인이 됐다. 이 잡지들은 순문학의 부흥을 꾀한다는 목적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들의 반응, 즉 ‘시장’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문학의 생산과 유통 과정이 이들 문학권력의 ‘닫힌 체제’ 안에서 이뤄졌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주요 문학출판사의 문예지들. 왼쪽부터 ‘문학동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1993년 신 씨가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로 큰 주목을 받은 이후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창비에서 고르게 책을 출간하며 “대중성에 이어 창비가 상징하는 진보적 가치와 문학적 상징자본을 일거에 획득해 한국문학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됐다”고 밝혔다.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에 대해 “신경숙은 ‘환금성(換金性)’이 탁월한 작가였고 그가 쓴 책을 발행하는 출판사는 그를 ‘한국문학의 보람’이라고 칭하며 떠받들었다”며 “이를 견제해야 할 비평가들은 출판사의 압력 속에서 반체제 지식인이 아닌 산업적 메커니즘의 일부로서 기능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신경숙 사태는 한국 문학이 돈과 패거리 권력으로 무장됐던 십여 년의 실험이 희·비극적으로, 어떤 희망 없는 변곡점에 도달한 사건으로 인식돼야 한다”며 “치매 상태에서 집 나가 행적을 알 수 없는 것은 신경숙 소설 속 ‘엄마’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문학’”이라고 했다.
토론자로 참가한 심보선 시인은 “이번 사태는 문학 시장과 문학 비평을 독점한 권력화된 시스템과 거기 결부된 작가와 평론가들의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며 “나쁜 관행이 작가들에게 시스템 안에만 들어오면 구미에 맞춰 대충 써도, 표절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나쁜 시그널(신호)을 보냈다”고 지적했다. 심 시인은 이어 “신경숙은 우리의 에이스가 아니다. 다수의 에이스를 육성하고 발굴해야 한다”고 발언해 청중들의 박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