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균 문화부 기자
인쇄되는 글은 일필휘지의 결과가 아니다. 더듬더듬 머리를 쥐어짜며 겨우 얻은 단어를 어찌어찌 늘어놓은 징검다리가 여러 검토 과정을 통해 다듬어져 독자를 만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얕은 깜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허튼 문장이 심심찮게 섞인다. 이름 건 글을 내놓으며 살아가는 건 어깨 위에 날마다 차곡차곡 짐 하나씩 보태 얹으며 걸어가는 것과 같다.
“글에 속았다.”
손에 잡은 글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는 건 읽는 이 각자의 권리다. 글로 미루어 글 쓴 사람을 판단하는 건 어떨까. 글은 공들여 정화된, 자아의 부분적 이미지다. 글 쓰는 걸 직업으로 삼아 살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내놓은 글에 ‘나를 대신해 살아가라’ 지시해서는 안 된다. 글은 분신(分身)이 아니다. 사람이 내놓는 허다한 삶의 흔적 중 하나일 따름이다.
글로, 노래로, 영화로 성공한 이들은 때로 자기가 글을 잘 써서, 노래를 잘 해서, 연출이나 연기가 뛰어나서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흔한 착각이다. 누군가가 사회적 성공을 거뒀다면 그렇게 만든 건 그의 글이나 노래, 영화가 아니다.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건 같은 시간 속에서 글을 읽어주고 노래를 들어주고 영화를 봐준 타인들이다. 누구든 사람들로 인해, 사람들 덕분에 성공한다.
글을 써서 성공을 얻었던 이의 잘못에 대해 많은 이들이 엄혹한 분노를 토하고 있다. 왜일까. 표절 논문을 인사치레처럼 내놓는 정치인들에게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실망하지 않는다. 포기했기 때문이다. 으레 그런 이들. 실망하거나 마음 아파할 대상이 아니다. 독자가 작가에게 분노하는 건 유권자가 정치인의 부도덕에 분개하는 것과 다르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솟는 거다.
‘내가 저런 이의 글을 읽고 밤새 가슴 설레며 눈물 흘렸다니.’
상처 입은 독자에게 작가가 사과할 방법이 있을까. 진심 담은 말은, 대체로 길지 않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