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비수사’의 한 장면.
이승재 기자
그러면 영화 기사나 평론에는 표절이 없을까. 놀랍게도 방금 내가 쓴 문장 ‘데이브는…설정이다’는 2012년 동아일보 민병선 기자가 쓴 기사의 문장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베껴 쓴 것이다.
자, 지금부터 최근 개봉된 곽경택 감독의 뛰어난 신작 ‘극비수사’를 평한 각 매체의 기사들을 재료 삼아 놀라운 표절의 기술을 선보여 드릴까 한다. 표절의 기술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먼저 하급기술부터. 문장의 배열순서만 달리 해도 완전히 새로운 시각처럼 보인다.
이 문장들을 뒤바꾸면서 표현을 살짝 임팩트 있게 바꾸면?
“‘극비수사’엔 반전이 없다. 그게 가장 큰 반전이다. 또 이 영화엔 한 방이 없다. 그게 가장 큰 한 방이다. 반전을 위한 반전을 노린 영화에 질린 관객에겐 오히려 흥미롭고 신선하다. 늘 웃음을 선물해 온 유해진에게서 웃음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진짜 반전이다. 호쾌한 액션과 추적 신을 기대했던 관객들이 실망하는 그 순간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이는 바로 그 순간인 것이다.”
어떤가. 훨씬 있어 보이면서도 통찰력이 줄줄 흐르는 평론이 아닌가 말이다. 표절은 이리도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중독되기 쉽다. 서로 다른 평론의 인상적인 한 대목씩을 따와 조립하는 기술도 있다. “역술가와 형사가 유괴사건을 해결한다는 실화는 지나치게 영화적이다”(한국일보)와 “증거로 승부 보는 형사와 감으로 승부 보는 도사의 만남이 새롭다”(한국아이닷컴)는 두 문장을 합친 뒤, 몇 가지 말장난을 추가하면 다음처럼 놀랍도록 창의적인 평론이 직조된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역설로 가득하다. 역술가와 형사가 유괴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은 실화라서 더욱 영화적이다. 증거로 승부 보는 형사와 감으로 승부 보는 도사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둘은 소신(所信)을 다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쌍둥이 같은 존재들이다.”
“곽경택 감독은 스릴러라는 장르를 연출의 도구로 소모해 버리지 않는다. 곽 감독이 내놓은 이야기가 스릴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 그는 땅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극비수사’를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하기는 힘들다. 그 대신 이 영화에는 최근 여타의 스릴러 영화에서 찾기 힘들었던 ‘좋은 태도’가 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극비수사’에는 삶에 대한 긍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뉴시스)
이 문단을 이렇게 바꿔본다.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를 보면 요즘 각광 받는 홍석천의 요리가 떠오른다. 홍석천의 요리가 행복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맛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요리엔 삶에 대한 긍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극비수사’가 바로 그렇다. 이 영화는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 있으면서도 장르를 망각하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극비수사’에는 다른 스릴러 영화에선 찾아보기 힘든 ‘좋은 태도’가 있다. 이건,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떤가. ‘태도’ ‘사람 이야기’ ‘긍정’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고스란히 베끼면서도 가일층 우아하고 감각적이고 미학적인 평이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누가 내게 ‘기사를 표절했다’고 비판한다면 난 이렇게 답하면 된다. “아무리 지난 기억을 뒤져 봐도 그런 기사를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라고. 벌써 나는 표절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