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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표절의 기술

입력 | 2015-06-25 03:00:00


영화 ‘극비수사’의 한 장면.

이승재 기자

소설가 신경숙의 작품을 둘러싼 작금의 표절 논란을 지켜보면서 나는 영화에도 충분히 비슷한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명량’을 만든 김한민 감독의 전작 ‘최종병기 활’은 배우 출신 멜 깁슨의 연출작 ‘아포칼립토’와 유사한 설정이 다수 발견되어 표절 시비가 있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도 미국 영화 ‘데이브’와 흡사하다는 논란이 일었다. ‘데이브’는 미국 대통령이 혼외정사 중 뇌중풍(뇌졸중)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지자 비서실장이 대통령과 닮은 직장인 데이브를 대역으로 내세운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장이나 단어의 사용을 살피며 유사점을 가려볼 수 있는 문학작품과 달리 영상과 시간의 예술인 영화는 글로 표현해 비교하는 데 한계가 따르므로 표절 여부를 명백하게 결론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영화 기사나 평론에는 표절이 없을까. 놀랍게도 방금 내가 쓴 문장 ‘데이브는…설정이다’는 2012년 동아일보 민병선 기자가 쓴 기사의 문장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베껴 쓴 것이다.

자, 지금부터 최근 개봉된 곽경택 감독의 뛰어난 신작 ‘극비수사’를 평한 각 매체의 기사들을 재료 삼아 놀라운 표절의 기술을 선보여 드릴까 한다. 표절의 기술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먼저 하급기술부터. 문장의 배열순서만 달리 해도 완전히 새로운 시각처럼 보인다.

“‘극비수사’는 일반 관객이 원하는 한 방은 없다. 반전도 없다. 그간 많은 작품에서 웃음을 전했던 유해진에게서 웃음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반전과 한 방, 호쾌한 액션, 추적 신을 기대하는 이들은 실망할 정도다. 하지만 반전을 위한 반전을 노린 영화에 질린 관객들에게는 흥미롭고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이 문장들을 뒤바꾸면서 표현을 살짝 임팩트 있게 바꾸면?

“‘극비수사’엔 반전이 없다. 그게 가장 큰 반전이다. 또 이 영화엔 한 방이 없다. 그게 가장 큰 한 방이다. 반전을 위한 반전을 노린 영화에 질린 관객에겐 오히려 흥미롭고 신선하다. 늘 웃음을 선물해 온 유해진에게서 웃음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진짜 반전이다. 호쾌한 액션과 추적 신을 기대했던 관객들이 실망하는 그 순간이 이 영화가 관객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이는 바로 그 순간인 것이다.”

어떤가. 훨씬 있어 보이면서도 통찰력이 줄줄 흐르는 평론이 아닌가 말이다. 표절은 이리도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중독되기 쉽다. 서로 다른 평론의 인상적인 한 대목씩을 따와 조립하는 기술도 있다. “역술가와 형사가 유괴사건을 해결한다는 실화는 지나치게 영화적이다”(한국일보)와 “증거로 승부 보는 형사와 감으로 승부 보는 도사의 만남이 새롭다”(한국아이닷컴)는 두 문장을 합친 뒤, 몇 가지 말장난을 추가하면 다음처럼 놀랍도록 창의적인 평론이 직조된다.

“이 영화는 아름다운 역설로 가득하다. 역술가와 형사가 유괴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은 실화라서 더욱 영화적이다. 증거로 승부 보는 형사와 감으로 승부 보는 도사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둘은 소신(所信)을 다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쌍둥이 같은 존재들이다.”

아, 내가 생각해도 천재적인 표절이 아닌가 말이다. 그 다음 소개할 표절의 기술은 고급기술. 문장을 재배치하는 동시에 몇 가지 표현을 더 매끈하고 세련되고 직관적으로 진화시켜 거의 새로 쓰듯 하면서 원본의 핵심 아이디어만 쏙쏙 베껴내는 방법이다.

“곽경택 감독은 스릴러라는 장르를 연출의 도구로 소모해 버리지 않는다. 곽 감독이 내놓은 이야기가 스릴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 그는 땅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극비수사’를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하기는 힘들다. 그 대신 이 영화에는 최근 여타의 스릴러 영화에서 찾기 힘들었던 ‘좋은 태도’가 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극비수사’에는 삶에 대한 긍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뉴시스)

이 문단을 이렇게 바꿔본다.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를 보면 요즘 각광 받는 홍석천의 요리가 떠오른다. 홍석천의 요리가 행복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맛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요리엔 삶에 대한 긍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 ‘극비수사’가 바로 그렇다. 이 영화는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 있으면서도 장르를 망각하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극비수사’에는 다른 스릴러 영화에선 찾아보기 힘든 ‘좋은 태도’가 있다. 이건,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떤가. ‘태도’ ‘사람 이야기’ ‘긍정’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고스란히 베끼면서도 가일층 우아하고 감각적이고 미학적인 평이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누가 내게 ‘기사를 표절했다’고 비판한다면 난 이렇게 답하면 된다. “아무리 지난 기억을 뒤져 봐도 그런 기사를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라고. 벌써 나는 표절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단 말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