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휴전선에서 다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이라며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을 예상하고 진저리치는 이 시는 전쟁의 상처에서 아직 진물이 흐르는 1956년에 발표됐다. ‘시방의 자리’ 휴전선이 일촉즉발로 여겨지던 때. 세월이 흘러 많은 한국인의 전쟁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삶이 화사해졌지만, 시인 박봉우는 끝내 그 상흔을 벗지 못했다. 민족의 구원을 개인의 구원보다 앞에 뒀던 시인은 술과 가난의 나날을 보냈다 한다. 이제 ‘시방의 자리’가 일촉즉발로는 여겨지지 않지만, 여전히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인 휴전선. 경의선 임진강역 구내에 가면 이 시를 새긴 시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