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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나라가 망하려면…”

입력 | 2015-06-29 03:00:00


고기정 경제부 차장

공무원 K가 사석에서 “나라가 망하려면…”이라고 운을 뗐다. 많이 놀랐다. 중앙부처의 현직 관료는 여간해선 정권이나 나라를 욕하지 않는다. K가 어느 날 갑자기 용감해진 것 같진 않다. 그보다는 누적된 실망에 지친 듯했다.

K는 “나라가 망하려면 국가와 국민이 밖을 보지 않고 안으로만 눈을 돌린다”고 했다. 로마는 서기 378년 고트족과 맞붙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가 전사했다. 로마의 쇠퇴는 이때부터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전부터 제국은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카이사르 때부터 이뤄진 정복 전쟁이 마무리된 까닭에 외부를 향한 긴장보다 내부에서 성공의 과실과 권력을 누가 어떻게 빼먹느냐가 중요했다.

부패와 사치로 국가의 총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아지자 황제는 인플레이션 유발로 발생한 막대한 세뇨리지(seigniorage·화폐 주조 이익)를 통해 부족분을 메웠다. 데나리온 은화의 순도를 동화(銅貨) 수준으로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오늘날과 달리 적자 국채 발행이 불가능하고, 세금을 더 뜯자니 시민 반발이 부담된 때문이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국가가 생필품 가격을 통제하고 암시장 상인들을 사형에 처했다. 식민지와 본토에 차별을 두지 않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근간으로 하는 팍스로마나는 이렇게 무너져갔다.

중국도 새 국가가 들어서면 오랑캐를 정리한답시고 잠시 정복 전쟁에 나서다 금세 대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영토 내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국가보다는 황권만 안정되면 된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15세기 명나라 영락제는 정화(鄭和)에게 함정 60여 척을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탐험케 했다. 길이 120m 목선이었던 정화의 배는 콜럼버스가 신대륙 원정 때 탔던 산타마리아호(26m)보다 4배 이상이었다. 하지만 영락제 사망 후 대항해는 흐지부지됐다. 중국에선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잉태된 시기를 이때쯤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역사에 밝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실크로드 재건을 들고 나온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

K는 지금의 한국도 안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다고 했다. 야당은 차기 권력 쟁탈에 눈이 멀어 있고, 청와대는 현재 권력을 사수하기 위해 여당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젊은이들도 영어 실력은 선배들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향한 패기가 더 있어 보이진 않는다.

공무원 중에서 K처럼 나라가 망할 것 같다고 하는 사람이 몇 더 있었다. 다른 한 공무원은 “제국의 종말은 황제의 재위 기간을 보면 알 수 있다”며 길어야 3년 정도 일하다 레임덕으로 식물 대통령이 되는 한국의 5년 단임 대통령제에 진저리를 쳤다.

대통령은 국회법이 개정되면 행정부가 무력화된다고 보고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행정부의 공무원들은 이미 여러 이유로 무기력해져 있다. 그 이유 중에는 대통령도 포함돼 있다. 가장 최근에 만난 고위 관료의 말이다. “4대 개혁이오? 청와대에서 하라니까 좍 밀고 나가지요. 근데 민간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요. 그러니까 그냥 공기업만 계속 조지고 있는 거죠. 이러다 보면 또 한 정권이 지나갑니다.”

고기정 경제부 차장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