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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월광(月光), 월광(月狂)

입력 | 2015-06-29 03:00:00


월광(月光), 월광(月狂) ―김태정(1963∼2011)



불을 끄고 누워
월광을 듣는 밤
낡고 먼지 낀 테이프는
헐거워진 소리로 담담한 듯, 그러나
아직 삭이지 못한 상처도 있다는 듯
이따금 톡톡 튀어 오르는 소리

소리를 이탈하는 저 소린
불행한 음악가가 남긴 광기와도 같아
까마득한 상처를 일깨워주네

어느 생엔가 문득 세상에 홀로 던져져
월광을 듣는 밤은
미칠 수 있어서
미칠 수 있어서 아름답네
오랜만에 상처가 나를 깨우니
나는 다시 세상 속에서 살고 싶어라

테이프가 늘어지듯 상처도
그렇게 헐거워졌으면 좋겠네
소리가 톡톡 튀어 오르듯 때론
추억도 그렇게 나를 일깨웠으면 좋겠네

불을 끄고 누워 월광을 듣는 밤
저 창밖의 환한 빛은
달빛인가 눈빛인가





이 시를 옮긴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은 끼끗하고 다정한, 그리고 슬픈 누이의 ‘저 푸른 어스름’ 같은 시들이 담긴 아름다운 시집이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시 ‘동백꽃 피는 해우소’).

‘불을 끄고 누워 월광을 듣는 밤’, 창밖이 달빛으로 환하단다. 화자가 누워 있는 방은 불야성과는 거리가 먼, 깊은 산중이거나 시골 벌판에 있을 테다. 화자는 가슴에 ‘아직 삭이지 못한 상처’가 있는 사람, 그런데 그 상처를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사람. 생각하면 무얼 하나 해서 저 깊이 밀어두었을 수도 있지만, 사는 데 급급해서 가슴의 상처를 돌아볼 새 없었을 수도 있다. 시인 김태정에게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시가 시집에 드물지 않다. 예컨대, ‘평창동 세검정 지나면/어김없이 나타나던 홍제동 재개발구역/저 고층 아파트 꼭대기쯤이었을까/발기발기 까뭉개진 산허리에/아스라이 들어서던 까치집 하나//야간대학 늦은 강의를 듣고 귀가하던 내가/꾸벅꾸벅 졸다 깨다/버스 차창에 열댓 번쯤 머리를 짓찧다가도/꼭 그쯤에서 잠이 깨 내어다보던/그 비탈 그 창가의 기우뚱한 삼십 촉 불빛/나처럼 늦은 귀가가 또 있어/이슥토록 꺼지지 않는//학비벌이 부업도 쫑나고/그나마 다니던 공장도 문을 닫아/터덜터덜 발품만 팔던 내가/졸다 깨다 졸다 깨다 다시 졸다/그쯤에서 잠이 깨 내어다보면’(시 ‘까치집’).

‘어느 생엔가 문득 세상에 홀로 던져져/월광을 듣는 밤’, ‘불행한 음악가가 남긴’ 음악이 한 외롭고 고단한 영혼에 흘러든다. 그 음악으로 ‘오랜만에 상처가 나를 깨우니/나는 다시 세상 속에서 살고 싶어라’. 이리 가슴 저려본 게 얼마 만인가! 아, 살아 있는 이 느낌!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