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거취’ 갈등] “배신의 정치” 나흘 만에 수석회의
말 아낀 대통령, 말 없는 비서실장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청와대 집현실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5일 여야 정치권을 맹폭했던 박 대통령은 이날 유승민 원내대표의 거취를 포함해 정치권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왼쪽 사진).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해 자리에 앉고 있다. 이 실장은 여권의 내홍 과정에서 중재자 역할을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 대통령의 침묵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이미 유승민 원내대표의 퇴진을 요구한 만큼 더 보탤 말이 없다는 뜻이다. 김무성 대표와 유 원내대표를 지원하는 비박계에 대한 ‘무언의 압박’인 셈이다.
또 다른 의미는 여권 내홍과의 거리 두기다. 박 대통령의 25일 국무회의 발언은 ‘일하는 대통령’ 대(對) ‘발목 잡는 국회’의 프레임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여당에 공을 넘긴 만큼 자신은 국정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 대통령은 이날 수석비서관회의에서 15분간 △24개 국정 핵심 과제 점검 △감염병 대응 체계 혁신 △과감한 소비 진작 대책 마련 △‘덩어리 규제’ 적극 발굴 및 개선 등을 주문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메르스와 극심한 가뭄 피해가 겹치면서 (우리 경제의) 충격이 커지고 있다”며 “경제를 정상적인 성장 궤도로 하루빨리 복귀시키고, 소비를 비롯해 일상적 경제활동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과감한 소비 진작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타이밍을 놓치면 돈은 돈대로 들어가고 효과는 못 내기 때문에 결국 빚더미에 앉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며 “속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속도전’을 주문했다.
하지만 유 원내대표의 거취를 둘러싼 여권 내분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국회는 멈춰 섰다. 당장 시급한 ‘메르스 추가경정예산’마저 국회 통과 시점이 불투명하다. 유 원내대표가 사퇴할 경우에도 새 원내지도부를 구성하는 데만 2주 이상 걸릴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박 대통령의 ‘유 원내대표 찍어 내기’로 상당 기간 ‘국정 지연’이 불가피해졌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이날 ‘속도전’을 주문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엇갈린 지시’에 청와대 내부에서도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문제는 청와대가 ‘유승민 리스크’를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있느냐다. 박 대통령이 직접 문제를 제기한 상황에서 참모들이 해법을 조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 원내대표가 빨리 사퇴하는 방식으로 내홍이 봉합되기만을 기다리는 형국인 것이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