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의원연맹-동서대 강연회 서청원 “수교 50년, 미래로 나아가자”… 벳쇼 日대사 “선린우호 의미 되새겨야”
한일의원연맹과 동서대 일본연구센터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조선통신사 선린외교의 재조명’ 기념강연회가 30일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강연이 끝난 직후 고 신기수 선생의 기록영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가 상영됐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3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선린외교의 재조명’ 기념강연회에서 고 신기수 선생의 기록영화 ‘에도 시대의 조선통신사’가 상영됐다. 한일의원연맹과 동서대 일본연구센터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 이날 행사에서 참석자들은 양국 선린외교의 아이콘으로 조선통신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다.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환영사에서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데모에 나서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제가 이제 한일의원연맹을 이끌게 돼 감회가 남다르다”며 “올해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 간의 실타래처럼 꼬인 문제를 풀고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영화 상영에 앞서 진행된 강연에서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는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풀어냈다. 정 교수에 따르면 통신사 호칭이 처음 쓰인 것은 1375년 고려시대였다. 당시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과 겹쳐 왜구가 극성을 부렸는데 고려 조정이 이들에 대한 통제를 요구하기 위해 무로마치 막부에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분기점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조선통신사와 더불어 일본 측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단인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가 교차로 양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국왕사의 한반도 입국을 불허했다. 이들이 일본 열도에서 한양까지 도달한 통로가 임진왜란 당시 침략 루트로 고스란히 활용됐기 때문이다.
또 양국 간 신뢰를 상징하는 통신사 호칭도 임진왜란 직후 한동안 쓰이지 않았다. 조선은 1607∼1624년 사절단의 명칭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만 불렀다. 일본이 보낸 국서에 대한 회답과 조선인 포로를 환국시키겠다는 사절단의 목적만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1636년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은 다시 조선통신사의 호칭을 회복하게 된다. 명에서 청으로 권력이 교체돼 중화질서가 붕괴되면서 조선과 청이 책봉체제에서 벗어난 독자적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