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논설위원
국민 속이려한 與원내대표
박 대통령은 제왕처럼 노기를 부렸지만 제왕이 아니었다. 여당 내 소수파에 불과한 친박 의원들만으로는 유승민을 강제 사퇴시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유승민은 힘 대결에서 밀리지 않는다. 다만 그가 밀리는 것은 정당성 싸움이다. 비박도 그의 국회법 개정안 처리가 옳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유승민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예상됨에도 국회법 개정안 통과를 주도했다. 이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으니 다시 통과시킬 책임도 그에게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 의원총회는 재의 표결에 불참하기로 했다. 유승민은 재의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당한 표를 얻는다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의원총회는 그런 길을 막아버리고 대통령의 거부권을 받아들였다. 유승민은 사실상 불신임을 받은 것이다. 의원총회가 그의 강제 사퇴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이 메시지를 읽지 못하면 모자란 사람이다.
유승민은 속으로 이렇게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야당이 원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주지 않았으면 공무원연금법 개정안도 통과되지 못했다. 국회선진화법하에서는 때로 대통령 거부권까지 감수하고 야당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회법은 법률이지만 그중에 헌법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닌 규정이 적지 않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 규정이 그렇고 이번 개정안도 그렇다. 원내대표 정도 되는 국회 지도자라면 국회법의 어느 규정이 그런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야 한다.
여당이 야당의 요구를 무조건 거부해서는 아무런 법안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연계처리 법안으로 받아들일 게 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있다. 국회의 행정입법 강제 규정은 설혹 위헌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른 법안에 연계하는 식으로 다룰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 정도 식견이 없다면 원내대표의 자격이 없다. 그가 더 위험한 일에 개입되기 전에 그를 사퇴시켜야 한다.
주역에 야윈 돼지가 뛰려고 하는 모양의 괘가 있다. 야윈 돼지가 우리를 뛰쳐나와 사방을 뛰어다니며 엉망으로 만들려는 순간에 그 돼지를 제지한 것이 이번 대통령 거부권 행사의 본질이다. 그 야윈 돼지가 꼭 유승민이 아니라 누가 됐더라도 제지했어야 한다. 제때 제지하지 못할 때 어떤 혼란이 벌어지는가는 국회선진화법이 이미 잘 보여주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