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1720년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 지방을 강타한 페스트 창궐 당시 당국의 대응을 철저히 기록해 둔 마르티그(Martigues)라는 작은 도시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720년 5월 25일, 페스트균에 오염된 직물을 싣고 중동 지역에서 떠나온 배 한 척이 마르세유 항에 입항했다. 위험 선박의 격리 기간을 너무 짧게 설정하고 시의 봉쇄를 너무 늦게 결정한 결과 마르세유에 페스트가 발병했고, 프로방스 전역에 전염병이 퍼졌다. 프로방스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2만 명이 사망했다니 피해 규모도 실로 엄청났다. 마르세유의 북서쪽에 위치한 마르티그 역시 이런 심대한 위기를 맞아 전염병과 싸워야 했다.
마르티그 시의회는 7월 31일 첫 회의를 소집하고 체계적인 예방조치를 강구했다. 우선 시내의 재고 식량을 조사·징발했다. 마르세유와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고 외지인 유입을 막기 위해 초소를 설치하여 감시를 강화했다. 동시에 비상시 환자를 유치하고 시체를 매장할 수 있도록 인력과 재원을 조사하고 병원 건물을 확보했다. 더 나아가 의사, 약사, 회계 관리인 그리고 ‘까마귀(corbeau)’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시체 운반인―이들은 얼굴과 온몸을 감싸는 특수 방역의상을 입고 일했다―등으로 12명의 위생위원회를 구성해 전염병 관련 사무의 최종 권위를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위생위원회는 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고위직 인사 중 다수가 시골 지역으로 피신했는데 위원회는 이들이 다시 자기 직무로 복귀하도록 했다.
이상의 사례들만 보면 시는 초기 대응을 제법 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전염병의 확산을 막아내지 못하고 큰 피해를 당했다. 어디에서 실수가 있었을까? 결정적인 문제 중 하나는 정보소통 부문이었다. 주민에게 필요한 정보를 빨리 또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관을 확보했어야 했다. 아마도 성당이 그런 기능을 맡아서 할 수 있었을 텐데 성당을 폐쇄해버린 것이 판단 실수였다. 주민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명확한 지시를 받을 수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거짓 정보나 왜곡된 사실이 돌았다.
의사들이 주민을 공연히 공포에 떨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로 전염병 발발 사실을 숨긴 채 페스트로 죽은 사람을 ‘자연사’로 판정하고 시체를 밤에 몰래 매장하도록 한 것이 화근이었다. 10월 29일, 환자가 없다는 마르티그 시의 보고를 그대로 믿은 상부기관에서 다른 지역과의 교역을 허락했다. 이웃 지역들이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으나 결국 시는 봉쇄를 풀었고, 병균은 광범위하게 퍼져 갔다. 페스트 사태는 해를 넘겨 1721년 6월 공식 종식됐다. 이때까지 마르티그에서만 2150명이 사망했다.
마르티그 시는 적절한 조치들을 잘 취하다 결정적 실수를 범해 자신들에게나 남에게나 큰 피해를 초래했지만, 최소한 사태 종식 이후에는 모범적으로 뒷마무리를 했다. 1723년, 시 당국은 전염병에 시달렸던 열두 달 사이 일어난 모든 일을 솔직하게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들이 저지른 판단 실수, 특히 결정적 시기에 주저하고 대책을 시행하지 않은 사실 등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다음 세대에 경고를 주고 우리 의견을 전하여 차후 현명한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는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마르티그 시 보고서는 이후 의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프로방스 지역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주경철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