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덕·산업부
최근 삼성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가 한 말이다. 노루는 삼성그룹 지배 구조의 정점에 서게 될 삼성물산이고, 노루의 목을 문 승냥이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다. 풀숲 속 승냥이들은 해외 헤지펀드들을, 호숫가의 하마는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나타낸다고 했다.
지난달 4일 모습을 드러낸 엘리엇은 그 명성처럼 강하고 질기다. ‘지배 구조 강화를 위해 삼성물산 주주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주장을 집요하게 제기하면서 국내외 투자자들을 결집하고 있다. 법원이 “이번 합병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삼성 관계자는 “삼성물산이 버텨 내지 못한다면 다음 타깃은 삼성전자가 될 것이고, 그 후엔 국내 기업 전체가 헤지펀드들의 놀이터로 전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벌써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 인베스트먼트는 삼성그룹의 다른 계열사인 삼성정밀화학 지분을 5% 확보했다. 2004년 삼성물산을 상대로 벌였던 경영권 분쟁을 또 다시 일으키지 말란 법이 없다.
문제는 이런 헤지펀드들의 공격에 대비할 울타리가 국내엔 없다는 것이다. 투기 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보호할 수 있는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장치가 국내엔 없다. 반면 투기 자본들의 주요 근거지인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이런 제도를 도입해 자본의 위협으로부터 자국 기업을 보호하고 있다.
SK㈜와 KT&G는 2003년과 2006년 각각 소버린자산운용과 칼 아이칸 등 해외 투기 자본의 공격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값이 비쌌지만 교훈은 남았다. 그런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교훈은 벌써 잊혀졌다.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알 만한 대기업이 해외 자본에 송두리째 넘어가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해야만 울타리를 세우려 들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