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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지 않을수록 순수함은 더욱 드러났다

입력 | 2015-07-06 03:00:00

성곡미술관 ‘비비안 마이어: 내니의 비밀’ 사진전




  《 철들고부터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고 가정해 보자. 유가족 없이 사망한 뒤 남겨진 일기장 더미를 우연히 손에 넣은 누군가가 그 문학적 가치를 알아보고 책으로 출간해 베스트셀러로 만든다. 그게 당신의 일기장이라면, 자신의 내밀한 기록이 생전에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언어로 번역돼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면, 당신의 영혼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9월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비비안 마이어: 내니(nanny·유모)의 비밀’전은 그런 의문을 안긴다. 》




1955년 5월 5일 비비언 마이어가 방 안에 마주 걸린 두 거울 사이에 서서 촬영한 자화상. 그는 온전히 자기만을 위해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수집한 사람들이 마이어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진을 맘대로 골라 공개하는 것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Vivian Maier/Maloof Collection

“모임에서 누군가 자기 얘기를 할라치면 재빨리 화제를 돌렸죠. 워낙 비밀이 많던 사람이에요. 자기 삶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지금의 상황이 달갑잖을 거예요.”

전시실 한편에 틀어놓은 BBC 다큐멘터리 ‘누가 유모의 사진을 찍었나’(2013년). “내가 열네 살 때부터 마이어가 드나드는 걸 봤다”는 필름현상소 사장 돈 플래시의 말이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비비언 마이어(1926∼2009)는 유모, 가정부, 간병인 일을 전전하다 독신으로 생을 마쳤다. 반려자로 삼은 건 늘 목에 걸고 다닌 독일제 롤라이플렉스와 라이카 카메라였다. 그는 25세 때부터 30여 년 동안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기록하며 약 12만 장의 사진을 남겼다.

인화된 필름은 극히 일부였다. 마이어는 작품을 발표해 전시하기는커녕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채 필름 더미만 늘려갔다. 수입의 대부분은 필름 보관창고 대여료로 썼다. 말년에 대여료가 연체되자 필름 더미가 압류돼 2007년 경매 처분됐다. 380달러(약 42만 원)를 내고 필름 수천 장을 사들인 부동산업자 존 멀루프는 그걸 조금씩 인화해 인터넷에서 팔았다. 어쩌다가 이것을 본 한 대학의 예술학 교수가 멀루프에게 사진의 가치를 깨우쳐 줬다. 그 후 멀루프는 마이어의 필름을 최대한 끌어모아 사업 아이템으로 삼았다. 현재 뉴욕 갤러리에서 판매하는 마이어의 사진 프린트 가격은 장당 수천 달러를 웃돈다.

제작 연도와 장소가 불분명한 작품. 마이어는 뷰파인더 반대편의 대상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가장 또렷한 특징을 잡아냈다. ⓒVivian Maier/Maloof Collection

이번 전시에서는 마이어가 남긴 흑백사진 78점과 컬러사진 20점, 비디오 필름 9점을 볼 수 있다. 가로등 기둥에 묶인 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빗물에 젖은 도로,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기 인형, 거리에서 경찰과 언쟁을 벌이는 여인,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신문가판대 주인…. 언뜻 흔한 소재 같지만 하나하나가 특별하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찍은 것이 아닌 사진’이 내놓는 기이한 아우라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셀피(selfie·자신을 찍은 사진) 좋아요 많이 받는 비결’이 생활정보 뉴스로 떠도는 세상에서, 마이어의 셀피가 보여주는 순수성은 당혹감마저 안긴다.

롤라이플렉스 필름 1통은 사진 12장을 찍을 수 있다. 마이어는 하루 1통 정도를 찍었다. 셔터를 난사하는 일 없이 마주하는 대상마다 하나의 이미지만 취했다. 카메라는 그가 세상을 살아내는 도구였고, 그의 사진은 이미지를 연결시키며 구축한 삶의 궤적이다. 다큐멘터리 말미에 돈 플래시가 다시 말한다.

“상황이 너무 과열됐어요. 200년 뒤쯤, 비비언에 대한 이야기가 잊혀지고 사진만 남게 되면, 그는 틀림없이 행복해할 겁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