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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렉시트’ 현실화땐 스페인-이탈리아로 불길 번질수도

입력 | 2015-07-07 03:00:00

[그리스 ‘긴축 반대’ 후폭풍]그리스 사태 어디로
치프라스 “48시간내 재협상 타결”… 부채탕감 기대하며 채권단 압박
‘벼랑 끝 전술’ 통할지 미지수
유로화 대신 드라크마화 부활땐 화폐가치 급락-인플레 불가피




“그리스는 스스로의 자살 유서에 서명한 셈이다.”(정치경제 컨설팅업체 유라시아그룹의 무즈타바 라만 수석분석가)

“유럽과 그리스를 새로운 타협으로 건너가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교량들을 파괴했다.”(지그마르 가브리엘 독일 부총리)

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안을 거부한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로 그리스 디폴트 사태는 유로화를 사용하는 19개국으로 이뤄진 유로존에서 탈퇴(그렉시트·Grexit)라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2010년 그리스 재정위기가 수면 위로 부상한 이후 수없이 등장해 양치기 소년의 구호(‘늑대가 나타났다’) 취급을 받던 그렉시트가 현실화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투표로 그리스가 택할 수 있는 것은 그렉시트나 재협상인데, 어느 쪽이든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며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새로운 불안 국면을 열었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다른 외신들도 그리스 정부의 ‘벼랑 끝 전술’에 염증을 느낀 국제채권단이 긴축재정을 관철하기 위해 그렉시트를 감수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도했다. 그리스 최대 채권국인 독일의 일간지 타게슈피겔은 “치프라스 정부는 그리스 국민을 쓰디쓴 희생과 절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는 가브리엘 독일 부총리의 발언을 전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로그룹 내에서 프랑스 정도만이 그리스를 구원하려고 들겠지만 내부 토론에서 이를 관철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라만 유라시아그룹 수석분석가의 부정적 전망을 소개했다. 그리스에 가장 동정적인 프랑스의 최대 은행인 BNP 파리바 은행도 6일 그렉시트의 가능성을 70%로 전망했다.

역사상 국가부도 사태는 여럿 있었다. 하지만 1999년 출범한 유로존 가입국이 이를 탈퇴한 전례는 없었다. 이번 투표 결과로 그리스가 ‘전대미문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단순히 구제금융액 상환 문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유로화를 종전 그리스 화폐인 드라크마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각종 법적 제도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드라크마 지폐를 다시 통용시킨다고 해도 은행컴퓨터를 통해 이를 인식시키는 데에도 몇 개월이 필요하다고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6일 지적했다. BBC는 “드라크마 전환 작업에만도 긴급 자금 250억 유로가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뿐만 아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긴급유동성자금(ELA)을 끊기만 해도 지금보다 더 큰 빚더미에 올라서야 하고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급격한 환율 하락으로 인한 생필품 부족과 생활고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그리스의 수출은 국내총생산(GDP)의 13%에 불과하고 쌓아둔 외환보유액도 30억 유로를 밑돌고 있다. 매일 ECB가 던져주는 ‘급전’으로 국민경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투표를 끝낸 그리스인들은 이번 국민투표 결과를 지렛대 삼아 유로존 탈퇴를 피하면서도 재정 긴축의 압박도 줄이는 한편 부채탕감(헤어컷)이란 추가 과실까지 따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에 젖어 있다. 그리스 부채 중 30%가량은 탕감해줄 필요가 있다고 명시한 지난달 26일 자 국제통화기금(IMF) 내부 보고서가 이런 기대감에 날개를 달아줬다. 그리스 정부에 가장 엄격했던 IMF조차 부채 경감이 없으면 그리스가 현재의 부채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6일 국민투표 발표를 앞두고 치프라스 총리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남겠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한 것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렉시트가 현실화할 경우 유로존이 통째로 흔들리게 된다. 비슷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같은 국가의 연쇄탈퇴 사태로 이어질 위험성이 커진다. ‘하나의 유럽’이란 모토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국제채권단이 헤어컷을 포함한 통 큰 결단을 내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지난주 은행부도(뱅크런) 사태를 막기 위해 문을 닫았던 그리스 은행들이 7일 다시 문을 열어도 사실상 보유 현금이 바닥난 상황이라 다시 바로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이는 지금까지 급전을 빌려 줬던 ECB에 달려 있다. 20일 닥쳐올 35억 유로(약 4조4000억 원) 규모의 ECB 채무 만기라는 대형 파도도 기다리고 있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 결과가 나오면 48시간 안에 국제채권단과 재협상을 완료하겠다고 강조했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채권단이 응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다른 유럽 지도자들도 차갑게 돌아선 상태다.

그렉시트 사태가 그리스에 안겨줄 유일한 위안거리는 환율 급변으로 해외 관광객이 급증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뿐이다. 그리스의 관광산업 매출은 GDP의 16%를 차지하고 전체 고용인구의 18%가 관광산업에 종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그 비중이 가장 높다. 올여름 그리스 관광에 나설 해외 관광객들이 유로화 현금만 두둑이 챙겨 가면 큰 불편 없이 저렴한 관광을 즐길 수 있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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