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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문 열린다”… 인구 3000명 도시 韓-中-러 각축전

입력 | 2015-07-08 03:00:00

[통일코리아 프로젝트 3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기회의 땅’ 유라시아를 가다]<上> 北-러 접경 ‘하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에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열차가 힘차게 달리고 있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유라시아 횡단철도는 언젠가 한반도와 연결돼 부산과 유럽을 육로로 이을 것이다. 하바롭스크=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노인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차를 타고 5시간을 달려 도착한 러시아 남동쪽 최변방 하산의 작은 마을 크라스키노.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한 러시아 국경지역에서 한국인을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성(姓)을 신씨라고 했다. 70세는 넘어 보이는 신 씨는 이름은 무언지, 왜 이곳에 사는지를 묻는 기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은 지 60년이 넘었다는 쓰러질 듯한 옛 소련 공동주택 앞마당의 낡은 의자에 멍한 표정으로 정물처럼 앉아있기만 할 뿐.

멀리서 열차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에서 발뒤꿈치를 들면 바닷가를 지나는 단선 철도가 한눈에 보인다. 어디로 가는 열차인지 물으니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온다. “나진으로 가는지, 청진으로 향하는지… 어쨌거나 강(두만강)은 건너는 열차일 게요.”

한반도의 북쪽 끝자락이자 대륙 진출의 문(門)인 북-러 접경도시 하산을 찾았다. 이 지정학적 요충지에서 한국 북한 러시아 중국 등 4개국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한 물밑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한반도와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고리’ 격인 하산을 중심으로 각국은 앞다퉈 영향력 확대를 위한 개발 청사진을 꺼내들고 있다.

○ 유라시아 대륙의 시작, 연해주

지난달 말 러시아 국경수비대와 세관원 3000여 명이 사는 한적한 도시 하산. 소외된 국경지대였던 이곳은 2013년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나진∼하산 철도(54km)가 개통되면서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나진∼하산 철도의 개통으로 시베리아횡단철도(9288km)와 한반도종단철도가 하나의 선(線)으로 이어지게 됐다. 강원 고성군의 동해선철도가 남북을 잇고 있기 때문에 부산과 유럽 대륙은 철도로 연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한반도 철도는 이미 대륙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하산에서는 중국 자본의 열풍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마을 곳곳에서 러시아어 간판보다 중국어 간판을 찾는 게 훨씬 쉽다. 이곳에서 70km 정도 가면 중국 지린(吉林) 성 훈춘(琿春). 이곳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유니베라 현지법인 장민석 법인장은 “하루 10회 정도 훈춘을 오가는 버스가 운행한다. 중국인들로 버스가 자주 꽉 찬다”고 했다.

하산에서 북한으로 향하는 열차는 주 1, 2회 석탄이나 사람을 싣고 이곳을 떠난다. 승객은 주로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일하는 북한 근로자들이다. 러시아의 종착지 격인 하산 역은 군사지역이라 접근이 철저히 통제돼 있다. 최소 6주 전에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러시아와 북한은 올 4월 철도 옆에 자동차 전용교량을 건설하는 내용의 협정에 서명하며 접경지역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철도는 러시아 철도공사와 북한이 2008년에 세운 합작회사 ‘나선콘트란스’가 관리하고 있다. 다리아 스테그니 나선콘트란스 극동지부장은 “나진∼하산 철도를 통해 1분기(1∼3월)에만 40만 t의 석탄을 실어 날랐다”며 “올해 200만 t을 운송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텅 빈 항구에 ‘청사진’ 들고 치열한 경쟁


하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1시간가량 올라가면 동해(러시아의 표트르대제 만)와 접한 항구 자루비노 항이 나온다. 취재진이 찾은 자루비노 항은 무역항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적이 감돌았다. 언제 도착했는지 알 수 없는 중고차 100여 대가 있을 뿐 그 흔한 컨테이너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당장은 거미줄이 쳐진 텅 빈 항구지만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이곳을 두고 러시아와 중국은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중국 훈춘과 불과 6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곳은 한반도와 철도로 바로 연결되는 곳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해 유럽 대륙으로도 곧장 갈 수 있다. 러시아는 극동 개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중국, 한반도와 인접한 새로운 항만 개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동북 3성에 대규모 제조업 생산기지를 구축한 중국은 동해, 태평양으로 바로 나갈 수 있는 항만을 마련해야 한다. 중국은 ‘훈춘∼나진∼상하이(上海)’ 컨테이너 화물운수 정기선을 지난달 개통하며 나진항 확보에 성공했다.

당장 북한과 철도망을 연결하기 어려운 한국은 이곳을 유라시아 대륙 진출을 위한 전략적 발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관계자는 “북한의 철도 및 전력 인프라의 수준이 낮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규모 투자가 필요할 것”이라며 “한국의 전략적 투자와 아울러 역내 다자협력기금 조성 등을 통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000억달러 AIIB, 극동개발 엔진”

러-中, 항만 투자 잇달아 발표… 정부 “한국기업 참여위해 노력”


155년 전인 1860년 아편전쟁을 치르며 서구 열강에 무릎을 꿇은 청나라는 베이징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러시아에 넘겨줬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지금 연해주에서는 유럽 대륙으로 향하는 관문을 확보하기 위한 각국의 치열한 각축전이 다시 벌어지고 있다. 곧 출범을 앞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극동 개발의 동력을 제공할 가능성이 커졌다.

러시아는 AIIB에 중국 못지않게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러시아는 AIIB의 지분 5.92%를 확보하며 중국 인도에 이어 지분 순위 3위에 올랐다. 20년 넘게 자본 부족으로 공전을 거듭하던 극동 연해주 지역 개발에 AIIB 자금을 끌어들인다는 게 러시아의 복안이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최근 “러시아는 도로 철도 교량 등 모든 인프라 프로젝트에 관심이 크다”며 “AIIB는 러-중 협력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막심 소콜로프 러시아 교통장관도 “2020년까지 AIIB 자금의 3분의 1 혹은 절반가량을 (러시아가)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기획재정부 당국자는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지역의 인프라를 건설하는 데 AIIB의 자금이 상당 부분 투입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 기업들이 향후 인프라 건설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AIIB의 초기 자본금은 1000억 달러(약 113조 원)다.

이미 연해주 개발을 위한 움직임은 시작됐다.

러시아의 대기업 숨마그룹은 2018년까지 연간 1000만 t의 화물을 처리할 수 있는 신항만을 자루비노에 건설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자루비노 항을 동북 3성의 전략적 물류 기지로 활용하고 싶어 하는 중국 정부는 이른바 ‘동해 출구’를 확보하기 위해 자루비노에 100조 원 규모의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중국은 하얼빈에서 훈춘까지 고속철도를 건설해 북한 나진을 통한 동해 진출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석배 주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는 “최근 서방의 경제 제재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극동지역 개발 의지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며 “향후 중국과의 협력이 전략적 방향성을 갖고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산=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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