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기호 소설가
“K 형? 아, 그 우리 단과대 학생회장 하던 형.”
“그래, 맞아. 그 형…. 그 형 얘기 우리 많이 했었잖아?”
“한 이십오 년 됐나? 근데 내가 얼마 전에 우연히 그 형을 만났다는 거 아니냐.”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 밤에 전화까지 해? 새벽 한 시가 넘었어, 상식아.”
“그 형도 많이 늙었더라. 배도 많이 나오고 이마도 벗겨지고…. 그 형 옛날엔 참 뾰족하고 날이 서 있었는데.”
“계속 그 형 얘기할 거야? 나 내일 여덟 시까지 출근해야 한다고.”
“근데 너 지금도 술 마신 거니? 그래서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지? 상식아, 제발 연애라도 해라, 응? 술 마시면 애인한테 전화를 해야지, 왜 남의 집 가장한테 전화를 하고 지랄이니? 나도 좀 살자, 응?”
“그 형이 그때 왜 학원 자주화 투쟁인가 뭔가 하다가 이 년 넘게 수배 생활 했잖아. 너도 기억나지? 우리 자취방에 그 형 숨어 들어와서 한 달인가 넘게 같이 있었잖아?”
“아, 몰라…. 그게 지금 뭐? 나 졸리다고.”
“그때 너랑 나랑 그 형 되게 존경하고 그랬잖아. 뭔가 막 멋있어 보이고, 의미도 있어 보이고, 또 진짜 숭고해 보이고…. 그래서 그 형이 무슨 쪽지 적어주면 너랑 나랑 막 결연한 표정으로 그걸 다른 선배들한테 몰래 전해주고 그랬잖아?”
“근데 그 형 경찰한테 잡히고 교도소 가고…. 그러다가 완전히 사라졌잖아. 다시 학교로 안 돌아오고…. 그래서 선배들이 그 형 변했다고, 변절했다고 말도 많았고.”
“아, 진짜 내가…. 그래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가 얼마 전에 그 형 만났을 때, 그걸 물어봤거든. 왜 그랬냐고? 왜 다시 돌아오지 않았냐고? 다른 선배들은 징역 살다가 나와서도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투쟁했는데.”
“나와서 뭐 연애라도 했겠지. 그러니까 그 생활 접은 거고…. 그러니까 너도 연애를 좀….”
“그 형이 그날 나한테 고백했는데…. 사실…. 그 형이 지병이 좀 있었대….”
“지병? 그 형이? 건강해 보였는데…. 뭐, 암이라도 걸렸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게…. 그 형이…. 사타구니 습진이 좀 심했나 봐…. 그거 때문에 수배 생활도 접게 됐고.”
“사타구니 습진? 아니 뭐 그게 대단한 병이라고….”
“그게 좀 괴로운 병이었나 봐. 그 형 말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는데…. 대학교 와서 더 심해졌대. 데모를 하고 구호를 외칠 때도 거기가 막 가렵고 그래가지고…. 그 생각 안 하려고 구호도 더 세게 외쳤고…. 그러다가 단과대 학생회장까지 하게 되고 그랬다나봐.”
“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친구 방에 숨어 있다가 경찰한테 붙잡힐 때도 사실 팬티 바람으로 선풍기를 이렇게 꽉 끌어안고 있었다나봐. 날은 덥고 거기는 막 가렵고 그래서 선풍기로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그게 뽀송뽀송 말라야지만 덜 가렵다나봐. 경찰이 들어오는 걸 빤히 보면서도 그걸…. 그 선풍기를 치울 수가 없더래…. 가려운데 선풍기 바람이 불어오니까 그게 너무 좋아서…. 그걸 치울 수가 없더래….”
“그러니까 사타구니 습진 때문에 운동을 접은 거라고?”
“그러고 교도소 가니까 그게 부끄러워서…. 자기가 너무 하찮아 보여서 돌아올 수가 없더래….”
“하아, 그러니까 오늘 네 이야기는 사타구니 습진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에 얼마나 커다란 악영향을 끼쳤는가, 뭐 그런 거구나?”
“근데, 병태야…. 너도 많이 가렵니?”
“무슨 소리야? 난 그런 병 없어? 난 원래부터 뽀송뽀송하다구!”
“근데 왜 난, 너나 나나 사람들 모두 다 이렇게 가려워 보이니? 다 가려운 거 긁느라 정신없어 보이니.”
“상식아, 이제 제발 자자. 그딴 소리 하지 말고. 그래야 너도 뽀송뽀송해지지. 내일도 덥단다. 사타구니 습진 얘긴 그만하고…. 그리고…. 제발 연애 좀 해. 상식아.”
이기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