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의 유럽’으로 불리는 러시아의 동진(東進) 전초기지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난달 말 찾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 6시,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시계 바늘은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역무원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모스크바 타임.”
유라시아의 동맥인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의 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걸린 시계는 유럽에 맞춰져 있었다. TSR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유럽을 잇는다는 점을 상징하는 듯했다. ‘동방을 지배한다’는 뜻의 도시명(名) 블라디보스토크가 접해있는 바다는 ‘표트르대제 만(灣)’이다. 300여 년 전 스웨덴을 정복한 러시아 절대군주의 이름을 딴 것만 봐도 이 도시가 러시아인에게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 한반도-유라시아 잇는 연결 통로
한반도와 유럽을 하나로 잇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바로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된다. 열차 플랫폼에는 숫자 ‘9288’이 새겨진 조형물이 서 있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길이 ‘9288km’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중국 하얼빈으로 가는 철도도 여기서 출발한다. 역사 맞은편 해안가에는 여객선 항구가 붙어 있다. 강원 속초시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배가 이 곳으로 들어온다. 비행기가 아닌 다른 교통편으로 유럽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북한 나진항과 러시아 하산을 잇는 철도가 완공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한반도와 유라시아대륙을 잇는 연결통로 역할을 하게 됐다.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두 차례 시범사업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러시아산 석탄은 모두 이 곳을 거쳤다. 서울에서 이달 14일 출발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원정대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독일 베를린까지 1만1900km를 달린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이미 한국기업들이 이용하는 유럽행 물류망이다. 현대상선은 시베리아철도를 통해 현대모비스의 자동차 부품을 모스크바로 운송하는 사업을 올해 시작했다. 한국 물류기업인 범한판토스는 2011년부터 현지법인을 통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한 러시아 극동~유럽간 철도운송 사업을 벌이고 있다. 조형렬 현대상선 블라디보스토크 법인장은 “부산에서 모스크바까지 배로 운송하면 2개월 가량 걸리지만, 철도로는 20일이면 충분하다”며 “약속한 기일에 맞춰 제품을 운송하기 때문에 재고 부담을 더는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극동에서 돌파구 찾자” 활발한 행보
2012년에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신(新)동방정책’을 대외정책의 핵심과제로 내세웠다. 부동항 확보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건설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동방정책이 시작됐다면 21세기에는 동북아시아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해 태평양 지역의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러시아정부가 청사진을 내놓고 있지만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주역이 될 한국기업들의 행보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1990년 수교를 맺은 뒤 블라디보스토크를 전초기지로 수많은 한국기업들이 유라시아의 문을 두드렸지만 ‘도시락 라면’ 신화를 일군 한국야쿠르트 정도를 제외하면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높은 문턱을 실감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근무 중인 한 국내 대기업 지사장은 “정부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라는 그럴 듯한 포장지만 내세웠을 뿐, 현장에서 체감할 만한 경제협력 방안은 찾기 어렵다”며 “거창한 의제보다 당장 통관절차 하나를 간소화 해주는 게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양기모 KOTRA 블라디보스토크 무역관장은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협력이 이뤄지고 있지만 대부분 단발성 프로젝트에 그치고 기관 간 공유도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게 현실”이라며 “민간을 중심으로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공사례를 차근차근 만들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이상훈기자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