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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의 시사讀說]영리하지만 정치력 없는 민족, 한국과 그리스

입력 | 2015-07-09 03:00:00


송평인 논설위원

그리스와 한국은 멀리서 보면 닮은 점이 많다. 유럽행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 쪽에서 유럽으로 들어서면 러시아의 평원 지대와 대조적인 발칸 반도의 쭈글쭈글한 산악 지형이 내려다보인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한국의 지형과 흡사하다.




빨치산 숨기 좋은 지형 비슷


역사도 그렇다. 산이 많은 곳이 빨치산이 숨기 좋다. 그리스는 터키 식민 지배 때부터 빨치산으로 이름 높다. 공산 빨치산은 그리스에서 나치를 몰아내는 데는 자유진영과 협력했으나 냉전 체제에서는 위협이 됐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은 그리스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나왔다. 그 무렵 지구 반대편에서도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

그리스는 분단을 겪진 않았지만 좌우 세력은 서로를 나치협력자와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대립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공산국가로 떨어져 나갔으나 한국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 속에서 불안한 정치를 이어갔다. 그 결과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가 싹을 내리지 못하고 군사 쿠데타를 맞았다.

그리스는 1974년 군사정권을 종식시켰다. 한국은 1987년에 민주화를 이뤘다. 그리스는 민주화 이후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경제적 급성장을 경험했다. 그러나 성장이 주춤해지자 파이를 나누는 갈등이 시작됐다. 그리스의 좌우 양대 정당은 집권만을 위해 무책임한 선심 공약을 남발하다 나라를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한국도 큰 스펙트럼에서 보면 그리스보다 조금 늦을 뿐 비슷한 경로를 가고 있다.

그리스는 예술의 나라다. 마리아 칼라스 같은 불멸의 소프라노를 낳았고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같은 뛰어난 작곡가도 배출했다. 게오르기오스 세페리아데스,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등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이 낯설다면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떠올려볼 수 있다. 배우 멜리나 메르쿠리, 가수 나나 무스쿠리 같은 연예인도 있다.

그리스는 국민 개개인은 뛰어나지만 정치의 그리스는 아니다. 고대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발상지이긴 하지만 그 민주주의는 아테네 지역에 한해 페리클레스 시대를 전후한 짧은 기간 나타났을 뿐이다. 고대 로마인의 눈에 이미 그리스는 예술에는 유능했지만 정치에는 무능한 민족으로 비쳤다.

그리스와 한국이 근대사회에 포섭된 것은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스는 400년간 터키 지배하에 있다가 1827년 독립하면서 르네상스 시대도, 계몽주의 시대도 비켜갔다. 그리스인이 다른 유럽인에 비해 합리적 사고와 규율이 몸에 배지 않은 이유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독일 베를린에 갔을 때 훔볼트대 앞에서 누군가가 내게 전단을 하나 건넸다. 그 전단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 그리스부터 끊어내자.’




정치지도자 부재도 같다

한국도 영리한 민족이지만 정치의 한국은 아니다. 광복 70년을 앞둔 지금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내세울 지도자도 없다. 훌륭한 지도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지도자에 대해서건 국민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 자체가 약점이다. 권위주의 정권의 강제 조정력이 민주화 이후 힘을 잃고 가신(家臣)정치의 지도자들마저 사라진 뒤 정치력 부재 현상이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마침 이런 때 성장률은 둔화하고 복지 요구는 폭증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일이 남 일 같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