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평해전’.
그는 정부 당국이 “혼란만 야기할 뿐”이라며 메르스 발생 병원과 지역 이름을 공개하지 않을 때 “메르스 최대의 처방약은 투명성”이라는 ‘신의 한 수’에 가까운 발언과 함께 정보 공개와 공유를 요구함으로써 일거에 주도권을 잡았다. “늑장 대응보다는 과잉 대응이 낫다”는 그의 한마디는 내용의 적절성을 떠나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같은 말만큼이나 일단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박 시장의 말을 듣다 보면, 드라마 ‘추적자’의 명대사 “정치라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야.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거지”가 절로 떠오른다. 그는 대중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 주는 것이다. 박 시장의 말발이 유독 세게 느껴지는 건 그가 대의와 명분, 그리고 선(善) 의지를 선점하는 단어를 쏙쏙 뽑아 쓰는 데서 비롯한다.
박 시장은 6월 13일 수만 명이 모이는 서울시 공무원 시험을 치러야 하는 매우 자가당착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이번에도 탁월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그는 말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시험을 준비하며 공무원의 꿈을 키워 온 젊은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오! ‘안전’보다 더 크고 근사한 단어 ‘꿈’을 내세운 것이다. 세상에 ‘꿈’보다 힘이 센 단어가 있을까. 박 시장이 즐겨 사용하는 ‘시민사회’ ‘공감’ ‘공개’ ‘공유’ ‘연대’ ‘소통’ ‘꿈’ ‘투명성’ 같은 명사들은 실체는 비록 모호할지라도 절대로 지지 않는 것이다. 요즘 가장 트렌디한 단어라고 하는 ‘배신’ ‘배반’ 같은 명사들에 비하면 얼마나 있어 보이고, 착하고, 사심 없고, 심지어는 ‘대통령스럽게’ 보이느냔 말이다.
2. 개봉 2주 만에 350만 관객을 넘은 영화 ‘연평해전’의 흥행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렇게 악플이 안 달리는 영화도 처음’이란 생각을 했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봐야 할 영화” “월드컵에 열광만 했던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같은 관람평이 압도적인 가운데, 부정적인 평가라고 해 봐야 “좀 지루하네요” “왜 평점이 높은지 모르겠네요”가 고작인 것이다. 왜일까. 이 영화가 마뜩잖더라도 대놓고 비판하긴 어려우니까. 이것은 진영의 논리를 초월한 ‘애국심’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연평해전’을 둘러싸고는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 세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두 번째는 ‘연평해전’과 똑같은 날(6월 24일) 개봉해 경쟁하다 결국 이 영화의 10분의 1 수준의 관객에 그치며 흥행에 실패한 영화 ‘소수의견’이 진보 성향의 작품이란 사실(‘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한 ‘소수의견’은 무지막지한 재개발로 희생된 힘없는 사람들이 연대하여 재벌, 검찰 등이 결합된 공고한 기득권 카르텔에 맞서다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연평해전’의 투자배급사가 과거 ‘변호인’을 투자배급하면서 일부 보수 세력으로부터 뜨거운 비난을 받았던 바로 그 회사라는 사실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8일 사퇴의 변을 통해 “원내대표 자리를 던지지 않았던 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라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유독 좋아하는 명사(‘법’ ‘원칙’ ‘정의’)들만 쏙쏙 뽑아 쓴 것도 같은 경우가 아닐까. 법과 원칙과 정의가 맞서 싸우는 대상은 불법과 무원칙과 불의가 아니라, 또 다른 편의 법과 원칙과 정의인 것이다. 아이, 어지러워.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