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광복 70주년 기념 특집]한국가곡의 역사②
임형주 팝페라테너
1931년 2월 10일은 국내 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바로 조선음악가협회가 창립된 것이지요. 당시 국내 대다수 언론도 협회 창립을 대서특필하며,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또 초대 이사장에는 현제명, 초대 이사진에는 홍난파, 안기영, 채동선, 독고선, 김인식 등이 선임되었는데, 조선음악가협회 창립은 한국 가곡의 정착은 물론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문화예술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음악가협회 창립이 큰 화제를 몰고 왔던 이유는 이전만 하더라도 몇몇 작은 사조직 정도에 불과했던 음악가들의 모임이 체계적인 대규모 집단으로 조직된 것은 당시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조선음악가협회는 이후 1931년 5월 28일 동아일보 학예부 후원으로 첫 정기 연주회를 개최하여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또 같은 해 현제명의 작곡집 제1집과 박태준의 동요집을 발간하여 한국 가곡과 동요의 체계적 악보화 작업을 하고, 대대적인 출판물 보급에 앞장서며 한국 가곡의 정착 및 부흥에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답니다.
한편 1932년 일본 도쿄의 와세다대를 거쳐 독일 베를린의 슈테른센음악원에서 작곡과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귀국한 채동선(1901∼1953)이 그의 누이인 소프라노 채선엽과 함께 김애식의 반주로 자신의 첫 가곡 발표회를 열어 음악계의 큰 주목을 끌었습니다. 채동선은 클래식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습득한 서양 스타일의 스케일이 크고 풍부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며 한국 가곡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손꼽힙니다. 게다가 그는 홍난파에게 직접 바이올린을 배웠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에서는 홍난파 특유의 서정적 멜로디 라인을 종종 느낄 수 있습니다.
채동선은 정지용의 시를 매우 아꼈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작품들 대부분을 정지용 시에 곡을 붙여 만들었지요. 특히 그의 대표작인 1933년 작 ‘고향’은 ‘민족의 노래’이자 ‘비운의 가곡’으로 꼽히는 곡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시인 정지용이 6·25전쟁 때 월북하면서 이 곡은 금지곡이 되어 버렸는데, 당시 이미 이 곡이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을 만큼 국민적 가곡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출판사는 급작스레 박화목의 시 ‘망향’으로 가사를 대신하여 재출판하게 됩니다. 가곡 ‘고향’이 ‘망향’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1960년대 중반 채동선 타계 12주년에 맞춰 그의 유족들이 정지용의 시로 만든 모든 곡들을 새 가사로 바꾸는 과정에서 ‘망향’을 이은상의 시 ‘그리워’로 다시 교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곡이 각기 다른 세 개의 제목과 가사를 달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 1988년 마침내 정지용의 시가 대부분 해금되면서 ‘고향’은 제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정말 ‘민족의 노래’라는 애칭처럼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처럼 기구한 운명을 갖게 된 곡이지요.
○ 한국 가곡의 부흥 이끈 주역들
한편 1931년 평양숭실학교에 다니던 18세의 파릇파릇한 청년 작곡가이던 김동진(1913∼2009)이 그의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봄이 오면’을 작곡하였으며, 이 곡은 당시 학생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게 됩니다. 특히 김동진은 틀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악상과 동양적 단아함을 기반으로 한 작곡 기법을 바탕으로 때론 장엄하고도 웅장한 스케일에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며 한국 가곡의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하였습니다. 더불어 ‘통절가곡’ 형식을 처음 도입하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한국 가곡계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뱃노래’, ‘가고파’, ‘파초’, ‘내 마음’, ‘수선화’ 등의 메가톤급 히트곡들을 쏟아내며 한국 가곡의 부흥기를 이끌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지요.
그뿐만 아니라 이흥렬은 당시 문단의 원로인 이무영을 비롯해 이관구, 이은상 등의 대표적인 문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예술적 스펙트럼을 넓혀 나갔습니다. 그중 시인 이은상과의 두터운 친분을 자랑했던 그는 이은상이 당시 경성보육학교 졸업 발표회를 위해 만든 아동극 ‘꽃동산’의 작곡을 계기로 20여 곡의 동요를 작곡하여 동요집 ‘꽃동산’을 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성태(1910∼2012)는 현제명의 지도 아래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워 갔습니다. 그러던 중 1934년 동요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출간을 계기로 작곡에 더욱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 도쿄로 음악 유학을 떠나게 되지요. 1937년 정지용의 시를 바탕으로 한 ‘바다’, ‘말’, ‘산 너머 저쪽’ 등의 곡을 발표하며 작곡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또한 그는 1940년 조선교향악단 창단 당시 자신이 작곡한 무용곡 ‘콩쥐팥쥐’를 발표하였으며, 이후 1941년 창작 무용극 ‘흥부와 놀부’를 자신의 지휘로 조선교향악단의 연주로 발표하여 큰 명성을 얻게 되었지요. 아울러 8·15 대한민국 광복 직후에는 ‘해방가요’로 불리는 ‘독립행진곡’, ‘아침해 고을시고’ 등을 작곡하였고, 이후 1945∼53년에는 자신의 최대 히트작인 ‘동심초’, ‘산유화’, ‘진달래꽃’, ‘꿈길’, ‘이별의 노래’ 등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우리나라 고유의 민요적인 색채와 소재를 서양 음악에 접목해 새로운 형식을 갖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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