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밀라노 엑스포의 한국관. ‘한식, 미래를 향한 제안: 음식이 생명이다’를 주제로 전시 중이다. 밀라노=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밀라노 엑스포에서 한국관은 인기가 높다. 찾는 이도 많다. 한국관은 ‘조화 치유 장수’란 키워드로 ‘음식이 곧 생명’임을 항아리와 1층 한식당을 통해 알리고 있다. ‘정중동(靜中動)’으로 풀어낸 기획이 세련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럽인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반면 선진국관은 실망스럽다. 창의적이지도 알차지도 않다. 인류 최대 현안에 대한 고민이나 대안 제시 노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멸망한다는 메시지로 위기감을 전달한 영국관이 그나마 체면을 살렸다. 정태영 현대카드 대표(현대자동차그룹 부회장)도 비슷한 느낌이었나 보다. 페이스북에 ‘전시관들의 내용이 엉성하다. 소문난 독일관도 기대낙차 컸다. 나의 마지막 엑스포 방문이 될 거라는 실망감’이라고 썼다.
1851년 런던 엑스포가 남긴 유산(Legacy)은 ‘수정왕궁(Crystal Palace)’이다. 이 온실구조의 대형 유리 건물은 조지프 팩스턴(1803∼1865)의 작품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게 기사 작위까지 내렸다. 1855년 다음 개최지는 파리.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수정왕궁을 능가할 유산 창출에 노심초사했다. ‘1855년 보르도 와인 공인등급’은 그 산물. 프랑스는 등급을 매긴 양조장의 와인에 차별화된 가격을 매겨 공개했다. 양조장에 ‘샤토’가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1893년 시카고 엑스포는 대규모(2.4km²·46개국·2700만 명 참관)였다. 국가관(Pavilion)도, 한국의 참가도 그때가 처음이다. 고종 임금이 보낸 조선 대표단은 한옥풍 전시관에서 곰방대, 한복, 총을 팔고 공연도 했다. 엑스포 터는 폐장 후 공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설계했다. 주역은 프레더릭 로 올름스테드였다. 뉴욕 시는 그의 아이디어를 높이 샀다. 그래서 도심 공원 설계를 그에게 맡겼는데 그게 센트럴파크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의 원천은 영국 리버풀의 버컨헤드 공원. 수정왕궁을 만든 팩스턴이 설계한 최초의 시민공원이다.
엑스포의 유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에펠탑을 탄생시킨 1889년 파리 엑스포는 화가 폴 고갱과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에게 새로운 영감을 줬다. 당시는 제국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 그래서 ‘니그로 빌리지’(아프리카 흑인 400명 전시) 같은 식민지관이 주축을 이뤘다. 동양과 아프리카 전통문화가 서양 대중과 민낯으로 대면한 것도 그때가 처음. 고갱은 폴리네시아 원주민의 남태평양관에서 화려한 색감과 원시의 순수를 보고 타히티행을 결심한다. 드뷔시의 후기 음악에는 인도네시아 자바관에서 들은 원주민 합주단의 전통음악이 영향을 줬다.
그 4년 후는 미국. 그런데 주최 도시 선정에 고심이 컸다. 에펠탑의 위용을 능가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 뉴욕 시가 유력 후보였다. 그런데 그걸 시카고가 낚아챘다. 뉴욕 일간지 선(The Sun) 기자의 글이 당시 뉴욕의 좌절감을 전한다. ‘바람만 쌩쌩 부는 도시(Windy City)에서 해봤자 뻔하지….’ 시카고의 애칭 ‘윈디시티’는 그렇게 탄생했다. 엑스포의 유산은 이렇듯 예측불허다.
밀라노(이탈리아)=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