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준 객원논설위원·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오늘 제67주년 제헌절을 맞아 평소 정치권이 헌법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인식과 행태를 지적하고자 한다. 헌법은 ‘국가의 기본 법칙으로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국가의 정치 조직 구성과 정치 작용 원칙을 정하는 최고의 규범’이다. 헌법은 역사와 정신이 녹아 있는 문서다. 헌법은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활용하는 정치 도구가 아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과 맞서다 원내대표에서 물러난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은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신을 배신자로 낙인찍어 몰아낸 박 대통령은 헌법 가치를 훼손한 사람이고 자신은 헌법 가치를 지키려다 희생된 사람이라는 뜻을 함축한 발언이다.
유 전 대표는 진정 목숨을 걸고 헌법 가치를 지키려고 했는가. 그랬다면 처음부터 대통령에게 사과하지 말았어야 했다. 반대로 박 대통령에게 누가 자기 정치를 하고 누가 더 헌법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지 치열하게 토론하자고 제안했어야 했다. 2004년 6월 고 김근태 의원이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를 반대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계급장 떼고 한번 붙어 보자”고 했던 것처럼 당당했어야 했다.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일단 비굴하게 사과했다가 사퇴하면서 헌법 가치를 운운한 것은 실망스럽다.
정치권에서 심심하면 개헌론이 제기된다. 권력이 대통령에게 너무 몰려 있어 권력을 잡기 위한 상쟁의 정치가 판을 치고, 5년 단임제에서는 책임 정치를 구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든다. 대안으로 4년 중임 대통령제 또는 내각 책임제가 거론된다. 단언컨대 국정 혼란과 정치 실패는 헌법(제도)이 아니라 운영(사람)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여당은 무조건 정부를 옹호하고,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빠져 있으며, 대통령 말 한마디에 집권당 원내대표가 쫓겨나는 상황에서 개헌한다고 책임 정치가 살아나고 ‘극단과 배제’의 정치가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다. 반대로 ‘참 무서운 대통령’을 더 오래 만나야 할지 모른다.
내각제로 바뀌면 권력이 분산돼 그동안 존재하지 않던 협치가 생겨날 것이라는 주장도 순진하다. 제왕적 대통령이 제왕적 총리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따라서 개헌보다 뒤틀리고 왜곡된 기존의 정치 운영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실효성 있는 해법이다.
대통령은 삼권 분립 원칙을 지키면서 국회와 야당을 존중하고, 국정 운영을 청와대에서 내각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정당은 의원들이 소신과 양심에 따라 의정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강제적 당론을 폐지하고, 만악(萬惡)의 근원인 공천제도를 혁신해 계파 정치를 종식시켜야 한다. 국회는 야당 동의가 없으면 어떤 법안도 통과하기 어려운 소수 독재의 전형인 국회선진화법을 우선적으로 개정해야 한다. 국민은 누가 헌법을 팔아 정치 장사를 하는지, 누가 정치 공학에 입각해 헌법 탓을 하는지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
헌법 가치를 운운하는 말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헌법 정신에 입각해 일관성 있게 행동해야 신뢰가 생기는 법이다. 개헌하면 정치가 정상화될 것이라는 제도 만능주의의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헌법은 문서가 아니라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