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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만난 사람]“언젠가는”… 북녘땅에 못다 피운 축구花

입력 | 2015-07-18 03:00:00

수제 축구화 만드는 김봉학 신창스포츠 사장




국내 유일의 ‘맞춤식 수제 축구화 장인’인 김봉학 신창스포츠 사장이 서울 중구 신당동 공장에서 축구화를 만들며 활짝 웃고 있다. 김 사장은 북한에 축구화 기술을 전수해 평양에 제1호 축구화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2일 오전 서울 성동구 금호동 금북초등학교 운동장. 배에 복막 투석기를 단 사람이 나타나더니 복대로 투석기를 감고 바로 뛰어나가 공을 찼다. 2시간여를 찼을까. 아직 성에 안 찬다는 듯 “한 경기 더 합시다”라고 외쳤다. 다른 ‘금일축구회’ 회원들이 “우린 더 못 찬다”며 그라운드를 떠나자 포기한 듯 축구화를 벗었다.

국내 유일의 ‘맞춤식 수제 축구화 장인’ 김봉학 신창스포츠 사장(54)은 신장이식 대기자이면서도 매주 축구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축구 마니아’다. 공을 차지 않으면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의사가 ‘축구 하면 안 된다’고 말려도 매주 토, 일요일은 축구화를 신고 운동장으로 향한다. 하루에 4번 2000cc씩의 약을 복막 투석기에 투여해야 하는 중증 환자이면서도 축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2008년 초 어느 날이었다. 북한 관련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북한 여자축구팀이 세계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데 축구화가 없다.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 유명 메이커는 안 신는다고 하니 몇 켤레 만들어주면 안 되겠느냐’는 부탁이었다. 평소 스포츠를 통한 남북 화합에 관심이 있던 터라 흔쾌히 “알겠다”고 했고, 선수들의 발 치수를 받아 선수별로 두 켤레씩 40켤레를 만들어 보냈다.

김봉학 사장이 만든 수제 축구화.

한 3개월이 지났을까. 다시 북한 관련 사업가에게 연락이 왔다. “북한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메시지였다. 알아보니 그해 뉴질랜드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 여자 월드컵에서 북한이 우승을 했다. 3개월 전 자신이 만들어준 축구화를 신고 우승한 것이다. 이에 북한에서 감사의 뜻으로 초청하겠다는 연락이었다.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에서 “평양에 축구화 공장을 세울 테니 도와 달라”고 했다. 그래서 축구화 만드는 기술의 전수 작업을 시작했다. 북한은 평양에 공장 터를 마련했다. 그런데 2010년 ‘5·24조치’가 터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함 피격을 대한민국을 공격한 북한의 군사도발이라고 규정짓고 북한에 책임을 묻기 위해 남북 관계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축구화 제작기술 전수 작업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물 건너갔다.

김 사장이 북한에 수제 축구화 기술을 전수하려는 이유는 북한을 도와준다는 뜻도 있지만, 사실 수제 축구화의 출발이 북한의 평양이기 때문에 ‘전통’을 되돌려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2011년 초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로부터 연락이 왔다. 북한에서 수제 축구화 전수 프로그램을 다시 해보자고 했다. 당시 송영길 인천시장과 안종복 인천 단장 등이 북한을 돕고 싶은데 방법을 찾지 못하다 축구화 기술 전수 프로그램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이번엔 북한으로 바로 갈 수 없었다. 남북 관계가 여전히 냉각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단둥에 공장을 마련해 북한에서 온 남녀 25명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서울 동대문 신창스포츠에 있던 기계 등을 모두 단둥으로 옮겼다. 기술을 제대로 전수하고 북한 노동자들이 만든 축구화를 국내로 들여와서 팔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해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김정은 체제로 바뀌면서 축구화 기술 전수 프로그램이 다시 중단됐다. 김 사장은 “어쩔 수 없이 떠났지만 축구화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거의 다 전수하고 왔다”고 말했다.

김 사장에게 수제 축구화는 ‘생명줄’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6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대구의 철공소에서 일했다. 빙과(아이스케키) 공장에서도 일했다. 그러다 ‘축구화를 만들어 팔면 돈을 많이 번다’는 얘기를 듣고 축구화 기술을 배우기 위해 13세 때 조그만 축구화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축구화 밑창의 스커드까지 가죽으로 만들던 시대였다. 2년간 돈도 받지 못하고 기술을 배웠다. 그렇게 축구화의 ‘기본’에 입문한 김 사장은 15세 되던 해에 신발 기술자의 견습공이 됐다. 욕먹고 맞아가며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로 18세에 ‘축구화 기술자’가 됐다. “집안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밤을 새워가며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하루 50켤레까지 만들며 당시 돈으로 주급 10만 원을 받던 호시절이었다.

돈을 크게 벌진 못했지만 먹고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가 들어왔고, 프로스펙스 등 국내 스포츠 브랜드도 축구화를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이 된 것이다. 축구화 판매량이 급격히 줄었다. 함께 축구화를 만들던 동료들도 하나둘씩 떠났다. 김 사장도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축구화 만드는 걸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버텼다. 남의 공장 한편에서 다시 축구화를 만들었다. 외상으로 가죽을 떼어와 일일이 가위질하고 꿰매 만든 신발을 어깨에 지고, 조기축구회와 동네 시장에 팔러 다녔다. ‘싸구려 축구화를 누가 사느냐’는 냉대를 엄청나게 받았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인 1988년 서울 동대문에 공장을 오픈했다. 처음엔 축구화를 만들어 팔기보다는 수선에 집중했다. 브랜드 축구화가 비싸다 보니 고쳐서 신는 사람이 많았다. 수선을 하면서도 축구화 만들기를 계속했고 1997년부터 다시 축구화 완제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신창스포츠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맞춤 축구화’를 만들고 있다.

“사실 우리 국민이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에 익숙해 수제 축구화를 팔기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만든 축구화를 한번 신어본 사람은 꼭 다시 찾는다.”

김 사장이 만든 축구화는 모양 등 디자인에서는 유명 브랜드에 뒤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편안하고 튼튼하다는 점에선 최고를 자부한다. “최상의 소재를 사용하고 튼튼하게 만들기 때문에 오래 신어도 틀어지거나 떨어지는 일이 없다”고 자신한다. 수제 축구화의 장점은 발 모양대로 만든다는 것. 발이 크거나 볼이 넓어도 상관없다. 양발의 차가 2∼3cm 나도 문제없다. 처음엔 조기축구회를 쫓아다니며 팔았지만 지금은 ‘입소문’을 듣고 축구화를 맞추러 오는 사람이 많다. 김 사장은 “수십 년간 축구화를 팔면서 한 번도 하자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도 품질에는 자신 있다. 하지만 다들 메이커를 좋아하지 이런 걸 신으려 하지 않아 아쉽다. 그래도 ‘내 발에 꼭 맞다’ ‘신어 보니 괜찮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뿌듯하다. 그만 접으라는 말을 수백 번 들으면서도 이걸 놓지 못하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김 사장은 편안하고 오래 신는 축구화만을 만드는 게 아니다. 연구와 연구를 거듭해 공을 더 잘 찰 수 있는 축구화를 개발하고 있다. 최근엔 강한 패스를 받을 때도 공이 발에서 멀리 튀지 않는 축구화를 개발했다. 또 프리킥을 정확하게 찰 수 있는 축구화도 만들었다. 축구화 기부도 하고 있다. 성동구 장애인축구팀에 축구화를 만들어주고 있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FC 바르셀로나 유소년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장결희에게도 축구화를 만들어줬다. 김 사장은 “결희가 바르셀로나에 진출할 때 만들어줬다. 편하고 좋다고 했는데 소속팀 스폰서 브랜드를 신어야 해 더이상 만들어주진 못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이 인공 투석을 하면서도 축구에 빠져 사는 이유는 병에 걸린 아들 때문이다. 1993년 돌도 되지 않은 아들이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지금까지 병원에 누워 있다. 속이 답답해 산을 찾아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어느 날 학교 운동장을 찾아 갑갑한 가슴을 달래고 있었는데 조기 축구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때부터 공을 찼다.

“축구화를 만들면서도 축구를 할 생각은 못 했다. 공을 차니 울적한 마음이 달래졌다. 지금도 축구화 만드는 시간과 축구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김 사장의 꿈은 소박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들이 일어나는 것이고 북한 평양에 제1호 축구화 공장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난 정치는 모른다. 북한 사람들을 만나 보니 정말 순수하더라. 솔직히 먹고살기 위해 뭐든 다 하는 분위기다. 정치적으로는 서로 욕하더라도 밑으로는 속칭 물밑 교섭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 북한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북한은 자국 축구화를 신고 월드컵에 출전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다시 기회가 온다면 북한에 축구화 공장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