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임숙 경제부 차장
몽골제국의 영토는 3320만 km²로 남한 면적의 330배가 넘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시절 대영제국(3670만 km²)을 제외하고 세계사에서 가장 넓은 나라였다. 하지만 단지 넓은 땅을 다스렸다는 이유로 칭기즈칸이 지난 1000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1995년 12월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로 꼽히진 않았을 것이다.
그와 그의 후손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광대한 자유무역지대를 형성해 기원전부터 꿈틀댔던 실크로드 무역을 꽃피웠다. 이 과정에서 동서양의 문명을 연결함으로써 ‘잠자던 유럽’을 깨워 세계사의 흐름을 바꿨다. 지배계급인 기사들이 각자의 장원을 나눠 갖고 자급자족하던 가난한 대륙 유럽은 이때를 계기로 동양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였다. 제지술, 인쇄술 덕에 기록문화도 꽃피기 시작했다. 화약은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꿨고, 중세시대 봉건제도가 무너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침반을 기반으로 ‘대항해 시대’가 열리기도 했다. 몽골제국이 없었더라면 대영제국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라시아 철도가 뭐기에 이렇게 요란한 행사를 벌이고 언론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가”라고 묻는 사람도 나온다. 이런 질문의 배경에는 ‘세계가 이미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여 있는 마당에…’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일견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육로로 연결하는 건 칭기즈칸 시대만큼이나 지금도 중요하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물류에서 철도는 다른 어떤 교통수단보다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이 교통수단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나라가 향후 유라시아 대륙 경제 발전의 열쇠를 쥘 가능성이 크다.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에는 여전히 잠자고 있는 자연자원이 풍부해 개발 잠재력이 높다.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 해상 실크로드 개발계획) 정책 중 하나인 신실크로드 경제벨트로, 러시아는 신동방정책으로 이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이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오히려 늦은 감이 적지 않다. 부산에서 모스크바까지 배로 물품을 운송하려면 2개월가량 걸리지만 철도로는 20일이면 충분하다. 이 때문에 이미 현대상선 등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 현지법인을 설치해 자동차부품 등을 유럽으로 운송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통일시대를 대비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당장의 경제적 의미를 뛰어넘는 더 큰 의미가 있다. 2013년 러시아와 북한을 잇는 나진∼하산 철도(54km)가 개통되면서 시베리아횡단철도와 한반도종단철도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질 길이 열렸다. 통일이 되면, 아니 그 전에라도 남북 합의만 이뤄지면 부산에서 강원 고성군의 동해선철도를 통해 유럽 대륙으로 한 번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분단 이후 ‘섬 아닌 섬’으로 고립됐던 한반도가 대륙 경제권에 묶이게 된다.
동아일보가 올해 4월 말 ‘2015 유라시아 교통·에너지 국제 콘퍼런스’를 연 데 이어 이달 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몽골 울란바토르 등을 취재해 ‘기회의 땅 유라시아 대륙을 가다’라는 시리즈 기사를 실은 것도 이 때문이다.
13세기의 몽골제국 때문에 ‘팍스 몽골리카(몽골의 평화·몽골의 지배 아래 유라시아 일대가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황)’라는 말이 나왔다. 작은 부족 출신의 칭기즈칸이 꿨던 꿈을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한국이 꾸지 말란 법도 없다.
하임숙 경제부 차장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