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가구 사는 전남 영광군 천기마을
전남 영광군 백수읍 천정리 천기마을 도로 길가에 쌓여 있던 비료 90포대. 하얀 동그라미는 마을 농부 A 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부딪힌 지점이다. 광주지검 제공
사건은 모내기에 쓰려고 논길에 쌓아둔 비료포대 때문에 불거졌다. 마을 주민 A 씨가 3월 18일 오전 11시경 50cc 오토바이를 타고 왕복 2차로 논길을 지나다가 오른쪽 길가에 쌓인 비료 90포대를 들이받고 사망했다. 주민들이 4월 초 모내기에 쓰려고 논 옆 길가에 매년 관행적으로 쌓아두던 비료포대를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무심코 비료포대를 길가에 쌓아뒀던 전모 씨(75) 등 동네 농부 3명은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기소 의견으로 광주지검에 송치됐다.
전 씨 등 3명은 “매년 해오던 대로 논 옆 길가에 포대를 쌓아둔 것뿐인데 이게 왜 벌을 받을 죄가 되느냐”며 반발했다. 도로교통법에는 교통에 방해가 될 만한 물건을 도로에 내버려두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온 70대 농부에게는 이웃사촌의 죽음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게 억울하게 느껴졌다. 피해자 유족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자 격분했다. 고요하던 마을을 뒤흔든 사망 사고에 주민들까지 감정싸움에 휘말렸다.
김용배 광주지검 형사조정위원회 운영실장(58) 등 6명은 지난달 24일 백수읍사무소에서 피의자인 전 씨 등 3명과 피해자 차남을 불러 2시간 30여 분 동안 ‘마라톤 중재’를 했다. 처음엔 차남이 “우리 형이 한마디 사과도 없는 가해자들을 직접 보면 죽이고 싶어질 거 같다고 해서 내가 대신 왔다”고 말했을 만큼 분위기가 험악했다. 김 실장이 비료포대를 쌓아둔 게 왜 처벌 대상인지 끈질기게 이해시키자 전 씨 등이 비로소 사과했다. 전 씨 등 3명이 총 900만 원을 물어주고 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장례비 300만 원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형사조정의 힘은 합의 사흘 뒤에 더욱 빛을 발했다. A 씨 부인이 광주지검으로 전화를 걸어 “피의자들 모두 남편과 평생 호형호제했던 이들인데 사과받은 걸로 만족한다”며 합의금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검찰은 전 씨 등 3명을 기소유예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사연을 들은 김진태 검찰총장은 17일 천기마을 마을회관에 대형 시계를 기증했다. 김해수 광주지검장은 조기룡 광주지검 형사2부장을 통해 마을에 돼지고기와 떡, 막걸리를 보내 마을 주민의 화합을 축하하고 최 씨 유족에게 감사를 표했다.
조 부장검사는 “형사조정 없이 처벌만 했다면 자칫 마을공동체가 비료포대 때문에 파괴될 수도 있었다”며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형사조정 덕에 마을 전체가 화목을 되찾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