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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옛 마을을 지나며

입력 | 2015-07-20 03:00:00


옛 마을을 지나며 ―김남주(1946∼1994)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옛 마을 풍경의 서늘한 아름다움이여, 시인의 서늘한 시선이여. 10년이나 투옥 생활을 하도록 시대의 억압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온몸으로 ‘전사(戰士)의 시’를 쓴 ‘시의 전사’ 김남주. 격정적으로 독설을 분출하던 그 뜨거운 심장에서 이리 지순한 서정이라니. 시인 김남주에 대한 평가는 이념적 평가만이 아니라 예술적 평가도 엇갈린다. 그의 시가 예술에 미달한다고 평가하는 이들은 시에 정치가 전면에 내세워져 있으며 시어가 사납다는 이유를 든다. 하지만 그의 시는 마디마디 장단이 딱딱 맞으며 리드미컬하다. 과격한 언어로 펼쳐지는 그 서사에 동의하건 반대하건 거기 뛰노는 맥, 줄기찬 가락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다.

‘저렇게 많은 별이 있구나 하늘에는/그것도 모르고 갑석이 마누라는 일만 하는구나/늦도록 밤늦도록 아이고 허리야/허리 한번 못 펴고 손톱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저렇게 많은 논과 밭이 있구나 땅에는/그것도 모르고 바보 갑석이는 고향을 뜨자는구나/지게질을 해도 서울로 가서 하자고/품팔이를 해도 대처에 가서 하자고//저렇게 많은 학교가 있구나 도시에는/그것도 모르고 재순이 아버지 갑석이는/재순이를 공장으로 내모는구나/열 살 먹은 막내까지 내모는구나//저렇게 많은 불빛이 있구나 강 건너 마을에는/그것도 모르고 재순이네는 다리 밑에 자리를 까는구나/마침 겨울이라 함박눈이 와서 그들을 덮어주는구나.’(시 ‘재순이네’) 김남주는 약소국이었던 나라의 사회주의자답게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농촌과 도시에서 착취당하며 사는 힘없이 소외된 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시인이 그토록 격렬하게 쟁취하고자 한 것은 이 하나,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었나.

김남주 같은 사람은 드물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불의가 없는 세상, 이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더라도 대개는 행동으로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주의자는 항상 패배하게 마련이다. 김남주가 꿈꾼 세상은 오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세상을 꿈꾸고 꾸준히 써왔기 때문에 반 발짝이라도 그 세상에 다가갔을 것이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