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는 말한다]<1>CSI의 시작과 끝, 현장감식 범죄현장 과학수사 어디까지 왔나
《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없앤 일명 ‘태완이법’(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민들은 수사기관이 끝까지 범인을 추적해 억울한 피해자의 한(恨)을 풀어주길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고 김태완 군 사건도 초동수사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면 일찍 해결될 수 있었다. 과학수사(CSI) 수준을 높여 사건 현장에서 용의자를 특정할 증거나 단서를 확보하는 것이 공소시효 폐지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다. 기획시리즈 ‘증거는 말한다’는 선혈이 낭자한 살인사건과 잿더미가 된 화재 현장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증거의 세계 등 한국 CSI의 현장을 생생하게 담았다. 》
손이 얼얼할 정도로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딸의 빌라 현관문은 열쇠공이 도착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철컥’ 소리를 냈다. 다급한 아버지가 내달리듯 들어섰다. 안방에선 거구의 남성이 배에서 피를 흘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연락이 끊겼던 딸은 작은방에서 시신으로 아버지를 맞았다. 바닥과 옷을 얼룩지게 한 피는 오래전에 굳은 듯했다. 숨이 붙은 남자는 “갑자기 강도가 들어와 우리 둘을 찌르고 달아났다”고 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이재준 현장감식팀장과 감식요원 4명이 지난해 출동했던 살인사건의 개요다. 두 사람이 흘린 혈흔은 집 안 곳곳에서 확인됐다. 여기서부터 범인을 찾아야 했다. 푸른빛을 내는 특수 손전등(현장 감식용 법광원)으로 정밀 감식을 시작하자 단서들이 쏟아졌다. 혈흔이 이미 바닥에 쓰러진 몸에서 흘러나왔는지, 움직이는 도중에 바닥으로 떨어졌는지(낙하 흔적) 구분이 가능했다.
쓰러진 여성은 출혈이 심했다. 한참이 지나 혈액이 굳었고 그 위로 남성의 혈액이 떨어졌다. 다른 사람의 혈액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남성이 흉기로 여성을 살해하고 자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 남성은 이미 수술실에 들어가 있어 배나 손목에 난 상처가 타인의 흉기에 의한 것인지, 스스로 만든 것인지 각도를 살펴보지 못했다. 수술 뒤 이 부분까지 확인하고 추궁하자 죄를 털어놨다.
인터넷을 통해 만난 여자의 집에 갔다가 사소한 시비 끝에 20여 차례 찔러 살해했다고 했다. 여자가 숨지자 스스로 손목을 그었고 불안한 듯 집 안을 돌아다닌 탓에 방과 거실은 그의 혈흔으로 얼룩졌다. 긴 시간이 지나고 밖에서 문을 두드리자 강도로 위장하려고 그때서야 자신의 배를 찌르고 둘러댔지만, 증거 앞에선 진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재준 팀장은 “현장에서 중요한 증거를 놓치면 사건이 장기 미제로 빠질 수밖에 없어 늘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보람도 크다”고 말했다. 최근 범인들도 비닐장갑을 끼거나 신발에 테이프를 붙이는 등 지문과 족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현장감식요원의 과학적 근성에는 당해내기 어렵다. 3월 서울 관악구의 한 모텔에서 10대 여중생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범행했고 칫솔, 수건 등 자신이 모텔에서 쓴 모든 물건을 없앴다. 당연히 지문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욕조도 깨끗했다. 하지만 요원들이 욕조 배수구의 좁은 틈에서 찾아낸 몇 올의 몸털 앞에서 이 사건의 범인 역시 고개를 떨궈야 했다.
범죄가 갈수록 지능화하지만 결정적 물증 앞에서는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과학수사(CSI)가 요즘 더욱 주목받는 이유다. 서울경찰청은 CSI 요원의 분석 능력을 드높이기 위해 지난달 9일 청사 지하에 현장실습장을 만들었다. 실습장은 60m²(약 18평) 크기의 아파트 내부를 똑같이 재현했다. 주부가 강도에게 저항하다 숨진 상황을 가정하고 ‘실습 수사’ 중인 CSI 요원들을 만났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