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우리도 해수욕장에나 놀러 갈까? 춘길이가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 그냥 먼 산이나 바라보면서 하품이나 하고 넘어갈걸…. 왜 그랬을까? 왜 나나 덕진이나 그 말에 그렇게 쉽게 혹하고 넘어가고 만 것일까? 아마도 춘길이가 했던 그다음 말, 그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도 해수욕도 막 하고, 여대생들한테 막 헌팅도 걸고, 또 막, 또 막 그러는 거지. 스물두 살 백수 처지에, 남들 다 가는 대학교도 못 가고, 그렇다고 무슨 직업 훈련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9월 군 입대 영장마저 받아 놓은 처지이니, 그래, 객기라도 한번 부려 보는 심정으로,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자들이 우리 대학생 아닌 거 금세 눈치 채면 어쩌지? 덕진이가 그렇게 물었을 때도 춘길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해수욕장에선 다 벗고 있으니까 뭐, 막 티 나진 않을 거야. 아니, 그러다가 어려운 거, 전공 같은 거 물어보면 어떡해? 춘길이는 그 말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뭐 막 체육특기자라고 그러지. 뭐, 마장마술 같은 거 한다고…. 돈은? 돈은 어쩌지? 너 돈 있어?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춘길이나 덕진이는 다시 원래의 그 모습, PC방에서 밤을 지새우고, PC방에서 컵라면을 사먹기 위해 전단 돌리는 아르바이트나 가끔씩 하는, 본연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돈은… 뭐 거기 가서 아르바이트하지, 뭐. 며칠만 해수욕장에서 아르바이트하면 일주일은 놀다 올 수 있을 거야. 춘길이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예전에 TV에서 봤는데, 해수욕장엔 여자들 등에 오일 발라 주는 아르바이트도 있대. 이걸 그냥 막 바르기만 하면 돈을 주는 거지. 춘길이의 말에 덕진이는 입을 딱 벌리기만 했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잘못이 크다…. 나라도 그때 정신을 차리고 친구들을 말렸어야 했다. 여기가 무슨 지중해 연안이라고 오일 발라 주는 아르바이트가 있을까? 왜 그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오일이라곤 프라이팬에 식용유 쳐 본 것이 전부인 처지에….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는 달랑 편도 차비만 손에 쥔 채 사흘 후, 강원도에 있는 P해수욕장을 찾아갔고, 점심을 옥수수 하나로 때운 처지인지라, 어떡하든 춘길이의 계획처럼 빨리 오일 발라 주는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떨어진 아르바이트 자리는 해수욕장 인근 사설 주차장 주차관리요원 자리였다.
“마침 사람이 필요하긴 한데 말이야…. 우리가 필요한 건 딱 두 명뿐인데….”
밀짚모자를 쓴 주차장 사장은 우리 세 명을 세워 두고 그렇게 말했다. 오전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둘이 합해서 일당 십만 원을 주는 조건이었다. 숙식이 필요하면 그것도 따로 제공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라도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니까 삼십삼 도는 훌쩍 넘는 한낮의 온도와, 그늘 한 점 없는 아스팔트의 지열과 자동차들이 내뿜는 배기가스들을 계산에 넣었다면, 단칼에 거절했어야 옳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해수욕장과, 그곳에서 뛰놀고 있는 여자들과, 당장이라도 그 여자들 앞에서 마장마술을 부릴 것 같은 춘길이와 덕진이를 보고 있자니, 그래 딱 나흘만, 딱 나흘만 고생하고 놀자 하고 말았던 것이다. 필요한 인원은 두 명뿐이지만, 세 명이 나눠서 하면 덜 피곤할 테니…. 그래, 그냥 눈감고 하자, 생각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채 사흘을 채우지 못한 채 주차장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말았다. 처음, 세 명이 교대로 일을 할 땐 그런대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덕진이가 몇 시간 만에 더위 먹은 개처럼 입을 계속 벌린 채 침을 헐떡이고(실제로 침을 질질 흘리면서 주차 안내를 했다), 그 뒤론 아예 걷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춘길이와 나, 단둘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째 되는 날엔 춘길이가 주차된 자동차 옆에 주저앉다가 종아리 부위에 커다랗게 화상을 당하고 말았다(자동차 배기구가 그렇게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춘길이의 종아리엔 금세 수포가 올라왔지만, 춘길이는 그 종아리를 질질 끌면서 주차 안내를 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한 친구는 더위를 먹어 연신 침을 흘리고, 또 한 친구는 화상을 입어 다리를 저는…. 그러면서도 이틀 뒤엔 남들처럼 해수욕장에 나가 헌팅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친구들…. 나는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사장에게 가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사장은, 덕진이와 춘길이를 한 번 쓱 바라보더니, 그러라고 흔쾌히 일당을 정산해 주었다. 이틀을 일했으니까 이십만 원. 거기에서 세 사람 이틀 치 숙박비, 식사비를 제하고 나니 팔만 원. 아니, 숙박비 식사비를 왜 제하는 거죠? 내가 따지자 사장이 말했다. 그건 내가 미리 말했잖아? 따로 필요하면 제공하겠다고. 지금 같은 성수기에 공짜가 어딨니? 나는 어쩐지 좀 눈물이 날 거 같았다. 해변엔 사람들이, 손대면 델 것 같은 미소를 머금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