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0>또 하나의 백제 오사카
일본 오사카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한반도에서 백제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할 당시 본토로 들어가는 첫 관문 역할을 했으며 광복 이후에도 한국 교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다. 오사카 시 남쪽 히가시스미요시 구에는 ① 백제대교 ② 백제 표지판 ③ 백제시계점 등 다양한 백제 관련 지명이 남아 있다. ④ 오사카 시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 사카이 시 료난 마을에 가면 ‘백제촌’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동종(銅鐘)도 볼 수 있다. 오사카·사카이=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백제 흔적은 언어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어로 ‘구다라나이(百濟無い)’라는 말은 ‘백제가 없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백제 물건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일본 문화에 스며든 백제의 영향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말까지 만들어졌을까.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大阪)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제일 먼저 닿은 항구였다. 오사카 항구의 옛 지명은 ‘나니와쓰(難波津)’인데 ‘험난 파도를 헤치고 당도한 항구’라는 뜻이다. 주어는 바로 도래인들이었다. 규슈(九州)에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라는 내해를 거치면 바로 오사카 항에 닿는다. 고대 이 코스로 들어간 이들 중 백제인들은 압도적이었다. 백제의 또 다른 얼굴 오사카로 떠나보자.
5월 21일 ‘百濟川(백제천)’이라는 강 이름이 있는 오사카 남쪽, 사카이 시로 향했다. 닌토쿠(仁德) 왕릉을 비롯한 대규모 능과 스에키 토기 유적지, 철기 유적지 등이 지금도 잘 보존된 곳이다.
오사카가 인구 200만 이상의 대도시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잿더미 위에 도시를 확장했던 1960년대 이후다. 오사카가 시내 중심으로 급변하는 동안 주변 도시 개발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그러다 보니 옛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날 취재에는 오시종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오사카 부 사카이 시 지단장이 동행했다. 70세가 넘는 재일교포였는데 ‘밥’ ‘이름’ 등 몇 가지 빼고는 한국어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백제천(구다라가와)’을 소개하면서 난데없이 “이제는 일본인들이 옛날처럼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이 식민 통치를 시작하면서 오사카 일대 한반도 관련 지명 대부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었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사카이 시 남쪽 주택가 료난 마을 약간 비스듬한 언덕길에는 ‘百濟村(백제촌)’이라는 이름의 동종(銅鐘)이 있었다. 양각으로 새겨진 한자가 매우 선명했다. 오 단장은 “언제 제작됐는지는 모르지만 주민들이 매우 아끼는 유물”이라고 했다. 동종 옆에는 ‘百濟湯(백제탕)’이라고 적힌 약수터가 있었다.
도래계 씨족은 이즈미국뿐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널리 퍼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10월 아사히신문에는 오사카 남동부의 유물 보존을 주제로, 한 고등학교 교사가 시집을 냈다는 기사가 실렸다. 교사가 쓴 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나의 고향 미나미카와치/…도래씨족은 미나미카와치에 거주한 씨족의 7할을 점했다고 한다/눈초리가 째진 듯한 미소녀나 쓸쓸한 망명귀족인 청년과 베를 짜는 여자, 절의 목수, 도기나 철기의 기술자들이 속속 건너온 이 비옥한 땅/고향인 신라나 백제의 땅과 어딘가 닮은 스산한 따뜻함과 밝은 분위기가 가득한 이 땅에 정착해 살았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잘라내고/…마을들은 구다라 향(百濟鄕)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시에는 먼 옛날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고 고향 땅과 비슷한 곳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꼈던 안도와 반가움,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 돌덩이처럼 자리 잡은 고향에 대한 향수가 구구절절 담겨 있다.
료난 마을을 조금 지나자 ‘사카이 시립 료난중학교’ 교문이 나왔다. 학교 문패 아래에는 ‘百濟門(백제문)’이라는 글귀가 따로 붙어 있었다. 오 단장은 “백제문은 주변에 백제 도래인 집단 촌락이 형성된 이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문을 세웠는데, 그 자리에 학교가 생기자 교문에 문 이름을 그대로 붙여놓은 것”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백제 문화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실감됐다.
마을 주변에는 백제인들의 집단거주를 증명이라도 하듯 대형 무덤만도 10곳이 넘었다. 여기서 나온 유물들은 백제가 직접 전해줬거나 백제의 기술이 응용된 철제 갑옷과 병기, 스에키 토기나 철제 농기구와 같은 생활용품들까지 다양하다. 미나미 미쓰히로(南光弘) 동오사카 문화재학회장은 “일본 전역에 절과 신사가 급격히 늘어난 7세기 후반 시점이 백제 멸망 이후 시점과 비슷하다는 점을 보면, 나라가 망한 후 백제인들이 일단 지금의 오사카 나라 지역에 집단 거주하다 이후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10세기에 이르러서는 일본 북동부에까지 퍼진 것으로 보인다. 미나미 회장은 “당시 일본에는 금 공예품이 없었는데 도호쿠(東北) 지역에서 금동 불상이 발굴됐다”며 “이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의 유품”이라고 했다.
도래인들이 일본 각지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추적하기 어려운 반면 왕족과 귀족들의 이주 기록과 경로는 유물 발굴로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확인된다.
예를 들어 오사카 나니와 궁터에서는 ‘百濟’라는 글씨가 새겨진 토기가 발굴됐고 나무에다 붓글씨를 쓴 목간(木簡)이 발견됐는데 비구니가 살던 절에 그의 아버지가 면회 허가를 얻기 위해 찾아간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목간에는 백제의 5부제를 본뜬 주소지가 나온다. 오사카역사박물관의 데라이 마코토(寺井誠) 주임학예원은 “오사카와 인근에 잔류하던 왕족과 호족들은 행정구역도 백제 방식으로 정하는 등 고향 백제와 똑같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미나미 회장은 또 “고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도래인들은 평민이나 귀족 가리지 않고 사찰과 신사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등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자주 발견됐다”고 말했다. 조안수 민단 오사카 시 스미요시·스미노예 구 지단장은 “요즘도 오사카로 새로 이주하는 동포들이 많은데, 종교가 없어도 신사에서 제사 음식을 나눠 먹는 등 일본 주민과 자연스러운 유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으니 지구상에서 한국과 일본만큼 동질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들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오사카에 도착하면 관광객들이 저렴한 술집과 포장마차가 즐비한 ‘도톤보리(道頓堀)’를 한 번 정도는 찾게 된다. 여기에는 길이 2.7km, 폭 28∼50m에 달하는 도톤보리 운하가 있는데 1612년 이것을 만든 나리야스 도톤도 백제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도톤보리’ 운하 개설을 맡았던 최고위 행정관(奉行)으로 공사를 직접 지휘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일본 학자들 중에는 백제 문화에 대한 존경심과 고마움을 솔직하게 표현해 기자를 오히려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사카오타니대의 다케타니 도시오(竹谷俊夫) 역사문화학과 교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다.
“백제인들은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치권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매우 중요한 인재였다. 일본이 여러 가지 이유로 도움을 요청해 초빙해 온 사람들 중엔 아예 그대로 정착해 일가를 이루고 산 사람들도 있다. 따라서 일본인들 중에는 백제인들의 후손이 상당하다고 봐야 한다. 백제의 높은 학문과 기술 덕에 백제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 내게도 백제인의 피가 흐를지 모른다.”
:: 오사카 ::
고대에는 나니와(難波), 중세 이후 오사카(大阪)로 고쳐졌다. 고대 아스카 시대의 중심지였으나 중세 들어 쇠퇴하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성(城)을 세우면서 급속하게 발전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상업도시로 발전해 도쿄에 이은 제2의 도시로 성장했다. 일본의 2대 교통중심지이기도 하다.
사카이=정위용 viyonz@donga.com / 오사카=이유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