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후계 분쟁]
롯데그룹의 지배구조는 일반 투자자는 물론이고 금융권이나 정부 당국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 걸쳐 118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이지만 기업공개나 금융권에서 돈 빌리기를 꺼리는 특유의 경영 스타일 탓에 속살이 철저히 숨겨져 왔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금융당국은 4일 “롯데그룹의 공시 위반 여부를 살펴볼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이 그룹 일부 계열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진행 중인 국세청도 필요할 경우 그룹 내 자금 흐름 전반으로 조사를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대기업 집단의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고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제도 개혁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에서만 81개 계열사 간 416개 순환출자 고리로 엮인 한국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최상층에는 호텔롯데가 있다.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호텔롯데의 최대주주는 19.1%를 보유한 일본 롯데홀딩스다. 하지만 일본 롯데홀딩스와 그 최대주주인 광윤사에 대해서는 누가 얼마의 지분을 갖고 있는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특히 광윤사에 대해서는 ‘종이상자 및 용기 제조업체로, 대표자는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신격호 총괄회장의 일본 이름)’라는 간략한 설명이 전부다.
일본에서도 상장사만 공시 의무가 있어 비상장사인 롯데홀딩스와 광윤사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최근 사태가 불거지면서 롯데그룹의 지배구조 전체를 들여다볼 방법을 찾아봤지만 불가능했다”며 “계열사에서 공시 위반이 있었는지 정도만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깜깜이 지배구조’는 롯데의 경영 스타일 때문에 생겼다. 소비재를 생산하는 롯데의 많은 계열사들이 안정적으로 현금을 창출하면서 ‘무차입 경영 원칙’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그동안 금융권에 재무상태나 지분구조를 드러낼 일이 없었다. 2013년에는 호텔롯데가 회사채 공모를 추진했다가 금융당국이 한국과 일본 관계사들의 지배구조에 대한 자료 제출을 요구하자 아예 공모 계획을 접기도 했다.
롯데 사태를 계기로 기업 공시제도 전반을 손질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비상장기업은 자산이 120억 원을 넘으면 외부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 외에 아무런 규제가 없다”며 “롯데처럼 비상장기업이 대기업 수준으로 커져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경우에는 일정 범위 내에서라도 정보를 공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도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등 기업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때가 됐다”고 말했다.
롯데 사태가 재벌 개혁 전반에 대한 논의로 확산되면서 재계는 긴장하고 있다. 4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 초기 ‘경제민주화’를 내세웠던 양상이 재연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재계 총수가 구속돼 있는 SK, 한화, LIG 그룹은 숨죽이며 사태를 주시하는 분위기다. 롯데 사태로 반(反)재벌 정서가 커져 8·15 특별사면에서 경제인들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송원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롯데 사태는 기본적으로 집안 문제이고 비상장을 선호하는 일본식 기업문화로 인해 사안이 커진 것”이라며 “한국 재벌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대기업 관계자도 “오너 경영은 한국 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나 경제적 위기 때에는 강점으로 거론되지만 이런 사태가 터지면 전근대적인 경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여야 구별 없이 비판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재벌의 불투명한 지배구조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요인”이라며 “정부의 일방적인 노동개혁 강행은 재벌과 대기업에 노동자의 생살여탈권을 넘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개혁보다 재벌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저질 폭로와 진흙탕 싸움이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며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되도록 혁신해야 한다”고 조속한 사태 수습을 촉구했다.
신민기 minki@donga.com·박형준·이재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