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태어난 곳이라고 조작한 백두산 밀영. 뒤에 보이는 산봉우리 가 정일봉.
황호택 논설주간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 중국 지리에 밝고 빨치산 경험이 있는 중국인과 조선인으로 88국제여단을 조직했다. 88여단의 부대원들은 만주를 점령한 일본에 밀려난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중국인 저우바오중(周保中)은 여느 중국인들처럼 8자를 좋아했고, 부대 안에서 유일한 신생아인 김정일이 라즈돌리네 마을길 88번지에서 태어난 것을 축복하는 뜻에서 88여단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소련군 병영에서 자랄 때 김정일의 이름은 유라였다. 한국의 정보당국은 1993년 아나톨리 李(러시아명)의 도움을 받아 김정숙(김정일의 어머니)의 출산을 도운 조산원 엘냐를 찾아냈다. 아나톨리 이는 국내 대학을 나온 뒤 러시아 하바롭스크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그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정보요원 두 명과 함께 당시 68세였던 엘냐를 만나 증언을 녹취했다”고 말했다. 엘냐는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김정일이 실제로 태어난 블라디보스토크인근 소련군 장교 숙소.
유라가 태어난 지 넉 달 만인 1941년 6월 88여단의 김일성 부대는 하바롭스크 동북쪽 아무르 강의 강변도시 뱌츠코예로 주둔지를 옮겼다. 엘냐가 수석조산원 연수차 하바롭스크에 머물 때 73km 떨어진 뱌츠코예로 가서 김정숙 모자를 3년 만에 상봉했다. 엘냐는 유라를 받을 때 조산원 경험이 부족해 탯줄을 길게 잘랐는데 3년 후에 만난 유라의 배꼽이 고추처럼 튀어나와 김정숙과 같이 웃었다고 한다.
유라는 마당에서 통신병 김애순이 낳은 한 살 아래 남자아이와 놀고 있었다. 엘냐는 “김애순 아들의 얼굴에서 김일성을 닮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고 회상했다. 이 아이는 훗날 최용건(88여단 대위·1948년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게 입양된 것으로 알려졌다. 뱌츠코예의 88여단 주둔지는 현재 도로 공사로 당시 건물과 숲들이 모두 사라지고 표지판만 남아 있다.
김일성은 자신의 뒤를 이어 ‘주체의 나라’ 북한을 통치할 아들이 소련군의 병영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민족의 신화가 서려 있는 백두산의 밀영을 끌어다 댔다. 황장엽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백두산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그럴듯한 곳을 찾아내 김정일이 태어난 밀영이라고 지적하고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명명했다. 김정일이 러시아에서 태어나 ‘유라’라는 이름으로 유년기를 보낸 것은 88여단의 항일 빨치산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거짓 설화를 창작한 것이다.
라즈돌리네 마을의 빨간 벽돌집에서 가까운 곳에 스탈린이 1937년 극동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열차가 출발했던 기차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해외 한인과 한국의 현대사가 서려 있는 장소를 보존하는 데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