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활 논설위원
이병철 삼성 창업자와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차이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국이 배출한 걸출한 두 기업인으로 경영 성적표만 보면 막상막하다. 그러나 이병철은 세 아들의 능력을 검증한 뒤 3남인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미리 낙점해 승계를 둘러싼 혼란을 막았다. 반면 80세가 넘어서도 모호한 태도를 취했던 정주영은 타계 한 해 전인 2000년 ‘왕자의 난’에 휘말리면서 힘겹게 일군 기업에도 상처를 입혔다.
집착과 ‘내려놓기’의 차이
올해 93세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 맨손으로 기업을 일으켜 모은 종잣돈을 바탕으로 1967년 한국에서의 사업을 시작했다. 최근 후계 분쟁에서 드러난 롯데가(家)의 행태와 불투명한 지배구조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다만 이 때문에 ‘신격호 롯데’가 48년간 만들어낸 수많은 일자리와 국가에 낸 세금, 경제적 부가가치를 통째로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가 확산되는 것은 걱정스럽다.
정주영이 ‘왕자의 난’ 때 보였던 건강상의 이상 징후도 감지된다. 신격호는 올해 초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을 모든 보직에서 해임했다. ‘한국 롯데는 신동빈, 일본 롯데는 신동주’라는 관측을 깬 결정이었다. 지난달 12일 신동빈이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로 선임돼 ‘신동빈 체제’가 굳어지나 싶더니 불과 보름 뒤 신격호는 다시 장남과 손잡아 혼란을 부추겼다. 하루에도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본인의 말과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정상적 판단능력을 상실했을 때 나타나는 노인성 질환의 대표적 증상이다.
롯데가의 진흙탕 싸움을 보면서 올해 90세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을 떠올렸다. 구인회 창업자의 뒤를 이은 2세 경영인이지만 사실은 20대부터 부친과 함께 산전수전을 겪으며 기업을 키운 1.5세대라고 할 수 있다.
반면교사와 벤치마킹 대상
구자경은 자신이 만 70세, 장남인 구본무 현 회장이 50세였던 1995년 스스로 회장에서 물러났고 이후 아들의 경영에 간섭하지 않았다. LG에서 GS가 분리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나오지 않게 만든 숨은 주역도 그였다. 어느 경제계 인사는 “지금도 구 명예회장이 가끔 곤지암 골프장을 찾으면 LG는 물론이고 GS 임원들도 달려가 90도로 인사할 만큼 진심 어린 존경을 받는 원로”라고 전했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